주일설교

누구의 자존심인가?

Author
kgmcc
Date
2023-02-05 03:18
Vi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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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다니엘 1장 17-21절

날짜 : 2023년 2월 5일

 

<다니엘 1장 17-21절>

17.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18.왕이 말한 대로 그들을 불러들일 기한이 찼으므로 환관장이 그들을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가니

19.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매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으므로 그들을 왕 앞에 서게 하고

20.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21.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사람에게는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게 되면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나 품위를 지킬려는 마음’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어로는 자존심을 Pride 혹은 Self-respect, self-esteem (자기 존중)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존중하는 것이 곧 자존심 이라 할수 있습니다. 한자어로 풀이해보아도 마찬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 자 존경 존 그리고 마음심 스스로 자신을 존경하는 마음이 자존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이 아니라 먼저 자기 스스로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곧 자존심의 출발점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는 이러한 자존심이 필요합니다.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자존심이 있는 인간으로 만드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8편 5절입니다. ‘5.그를(사람을 의미)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영화와 존귀는 하나님에게만 사용될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우리 인간의 머리에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워주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을 닮은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씌워주신 영화와 존귀의 관을 보면서 고개를 숙이고 순종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대리자의 신분으로 짐승들의 이름을 다 지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는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프라이드가 아주 강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고 하는 자부심과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걸작품‘ 이라고 하는 자존심이 아담과 하와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탄으로부터 ’네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고 하는 유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에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을 나뭇잎으로 가리고 숨어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자존심이 상처를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원래 그 존귀하고 거룩한 자존심이 파괴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 인간의 자존심을 파괴하고 부끄럽고 수치심이 생기게 해서 자기 자신을 자학하게 만듭니다. 자기 자신을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열등하다고 하는 열등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게 되면 자신이 지은 그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리고 죄책감 가운데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아들 예수님을 이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은 무너지고 파괴된 우리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낮은 이땅에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온갖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입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의 신분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상태도 같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말해서 우리의 무너지고 파괴된 자존심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믿는 성도인 우리는 옛날의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하여 아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입니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하신 일을 내가 이루어’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 라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일을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셨다는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생명을 바치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시기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을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시기 위해 믿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이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이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자존심입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과 모습이 우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 인간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힘들어 합니다. 괴로워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우리 인간은 반항적이고 파괴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자존심이 상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폭행을 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너진 자존심의 회복이 없이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과 풍요로운 삶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자존심이 무너진 사람은 신경이 예민하고 파괴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인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상처받고 파괴되었던 자존심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이세상을 살아갈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는 늘 자존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조차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습니까? 큰 병이 나서 수술 몇 번을 하게 되면 우리가 가진 것 다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압니까? 우리가 착하면 얼마나 착합니까? 누가 나를 조금이라도 무시하면 나는 더 이상 착한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내 자존심 내 체면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성도가 자기 남편이 위독하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이제 곧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구원시켜야겠다는 생각에 목사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함께 죽었던 강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때에 두명의 강도들도 좌편과 우편에 함께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우편에 있는 한 강도는 죽기 바로 전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선생님도 이 강도처럼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구원받아 천국에 갈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힘없는 목소리로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강도가 아닙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네요’ 이렇게 우리 주변을 보게 되면 자기의 자존심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경은 자신의 자존심을 하나님앞에서 내려놓아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나아만 장군을 보십시오. 아람나라의 군대장관이었던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전쟁중에 포로로 잡혀온 유대나라 어린 여종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엘리사라는 선지자가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어떤 병이라도 고침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나아만 장군은 왕이 써준 편지와 또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방문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집안에서 나와 보지도 않고 종을 보내서 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을 합니다. 엘리사도 아닌 종의 말을 듣게 된 이 나아만 장군은 정말 자존심이 상했고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몸이 깨끗하게 나음을 입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음으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삭개오 세리장을 보십시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은데다가 키도 작아서 지나가는 예수님을 볼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세리장이라고 하는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나무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지나가시다가 나무위에서 멈추시고는 삭개오를 내려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삭개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삭개오야 오늘 내가 너희집에서 하룻밤 머물러야 하겠다’ 그 현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삭개오 한사람 뿐이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삭개오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자신의 자존심을 내버리고 돌무화과 나무위로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자존심을 내 버렸을 때 이러한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을 예수님 앞에 데려온 가나안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 주는 떡을 개에게 줄수 없느니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 여인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딸이 귀신들린것도 고통스러운데 개 라고 하는 소리까지 들었으니까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고 마음에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주님 맞습니다. 하지만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받아먹습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자기의 자존심을 주님앞에 다 내려놓은 이 가나안 여인은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는 칭찬과 함께 딸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앞에서는 자존심이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앞에서는 내 자존심을 내려놓을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나 인류 역사를 보게 되면 그시대에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은 사람들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갈때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하루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있는 형들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자기형 들을 비롯해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두가 다 몸짓이 거대한 골리앗장군을 보면서 두려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3미터가 되는 골리앗 장군이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누가 나와서 나와 싸우자고 말하고 있는데 그누구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하고 있지만 그누구도 나가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군인이 아닌 어린 목동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있을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 장군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정말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시편 13편 4절입니다. ‘4.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다윗은 내가 흔들리고 쓰러지면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흔들리고 쓰러지지 않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우신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내가 흔들리고 넘어지면 하나님의 자존심이 상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자기의 자존심 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자존심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니엘과 세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열 일곱살이나 열 여덟살의 나이에 포로의 신분으로 바벨론으로 끌려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라고 하는 정체성이 분명했습니다. 다니엘서 1장 8절입니다. ‘8.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포로의 신분으로서 왕이 먹는 음식과 포도주를 마실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고 영광입니까? 그런데도 다니엘은 그 음식 먹기를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그당시에 왕이 먹는 음식은 먼저 바벨론의 신들에게 바쳐진 다음에 왕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음식은 우상의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음식이 아니라 바벨론의 신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세명의 친구들은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7배나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을 결코 금 신상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존심이다‘ 라고 생각을 하며 살았던 그들을 하나님은 높이십니다. 그래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윗처럼 다니엘과 그의 3명의 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처럼 우리에게도 특별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갈 때 받게 되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특별한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본문 17절입니다. ‘17.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다니엘은 또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더라’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셨으니’ 학문과 서적을 대할 때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지혜인데 이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어느만큼의 지혜인가하면 20절에 더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20.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온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배나 더 나은 지혜와 총명을 받았던 것’ 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열배나 더 뛰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정도인지 구체적으로 감이 잘 오지 않습니다. 지혜와 총명이 열배나 더 많다. 지혜와 총명을 오늘날 아이큐로 계산하면 보다 쉽게 이해가 됩니다. 바보라고 불리는 사람의 아이큐는 대개 80정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두배이면 아이큐가 160입니다. 아이큐 160 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아이큐 150이 넘어가면 천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 슈타인 박사가 180이고 시인 괴테는 190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기네스북에 올라와있는 세계 최고로 아이큐가 높은 사람은 호주 출신인 터렌스 타오로서 아이큐가 230 이라고 합니다. 20살에 프리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4살에 UCLA에서 최연소 교수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아이큐가 제일 높았던 사람은 김웅용씨인데 다섯살에 4개국 언어를 말하고 미적분을 풀었는데 아이큐가 210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50이상이면 천재소리를 듣고 아이큐 200이 되면 거의 인간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당시 세상 최강 국가이었던 바벨론나라에서 똑똑한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아이큐 140은 되었을 것입니다. 아이큐 140에서 열배는 얼마입니까? 1400입니다. 아이큐 1400이 되는 사람이 이세상에 있나요? 하나님께서 이런 특별한 지혜와 총명을 다니엘과 세친구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지혜와 총명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바벨론 왕이 나라 일을 그들과 같이 의논을 했습니다. 박수와 술객들을 모아놓고 의논을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는데 다니엘과 그 세명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 그냥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에 미국과 중국간의 무역 전쟁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그 누구도 선뜻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그 세명의 친구들은 이 문제를 쉽게 풀어낼 것입니다. 또한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온 세계가 골치를 앓고 있는데 이 문제도 다니엘과 세명의 친구들에게는 쉽게 답이 나오는 차원의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북한 김정은이가 저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그들에게는 쉽게 답이 나오는 차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지혜와 총명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나는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다니엘과 그의 세친구가 받았던 그 지혜와 총명을 받으며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갈 때 받게 되는 축복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두 번째의 축복은 특별한 영향력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21.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표준 새번역 성경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21. 다니엘은 고레스 왕 일년까지 그곳 왕궁에 머물고 있었다’ ‘왕궁에 머물고 있었다’ 는 의미는 지도자로서 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은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영향력있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다니엘은 열 일곱살에 포로의 신분으로 끌려왔지만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루는 느부갓네살왕의 꿈을 해몽 해줄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됩니다. 그이후 느부갓네살왕이 죽고 그아들 벨사살이 왕이 되었을때에도 다니엘은 총리로서 계속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바벨론의 벨사살왕이 메데의 다리오 왕에게 정복을 당합니다, 그당시 이 메데의 다리오왕은 자기나라를 120도로 나누어 다스립니다. 우리나라가 조선 팔도라고 하는데 120도라니까 얼마나 큰 나라입니까? 그래서 나라를 세명의 총리로 나누어 통치하게 했는데 세명의 총리중 한사람이 바로 다니엘이었던 것입니다. 메데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적군의 나라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이 메데 나라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후 이 메데는 바사의 고레스왕에게 합병이 됩니다. 그리고 이 고레스가 애굽나라를 정복함으로서 페르시아라는 아주 큰 나라가 탄생하게 됩니다. 다니엘 6장 28절입니다. ‘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메데 다리오 왕과 바사 고레스 왕의 시대에도 다니엘은 형통ᄒᆞ게 됩니다. 이렇게 다니엘은 여러 나라와 왕이 바뀌어도 오랫동안 지도자로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았더니만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수 있도록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옛날 노예제도가 있었을때입니다. 어느날 아침에 한무리의 노예들이 고개를 숙이고 패잔병처럼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젊은 노예는 머리를 꼿꼿이 세운채로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예를 사러온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저 젊은 노예는 왜 저렇게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행동을 합니까? 그러자 노예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저 노예는 아프리카 어느 한 지역의 왕자랍니다”. 그래요. 그 젊은 노예는 비록 지금 자기가 노예이지만 한 나라의 왕자라는 신분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살았던 것입니다. 왕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살아가지만 억울한 일을 당할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가정이나 직장에서 힘들때가 있습니다. 건강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할때도 있고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자존심이 상할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8장 11절입니다.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우리를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하나님 당신 자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고 살아갑니까? 우리는 내 자존심이 상하고 무너지면 괴로워하고 분노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히게 되고 하나님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도 기분나빠하거나 분노하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심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자존심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존심인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존심이요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프라우드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배우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들게 이 작은교회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이 자존심이 지켜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자는 당당합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누가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농담을 해도 별로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어릴 때 남자로서 제일 잘 생긴 사람은 지금은 세상을 떠난 신성일 배우가 아닐까 제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누가 이 신성일씨를 보고 당신 참 못생겼네 말하면 이 신성일씨는 웃을 것입니다. 전혀 상처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왜요?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생겼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못생겼다고 말하고 있는 당신보다는 내가 훨씬 더 잘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농담삼아 지나가는 말에도 상처를 받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서 수군 수군 대고 예수님을 믿어도 그렇게 튀나게 믿느냐 이렇게 별의별 이야기를 다해도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나의 자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이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가정에서 우리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세상에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