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악인의 형통

Author
kgmcc
Date
2023-02-12 05:05
Views
21
본문 : 잠언 24장 16-22절

날짜 : 2023년 2월 12일

 

<잠언 24장 16~22절>

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7.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오늘 본문이 기록된 잠언서 는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내용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지내온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된 삶의 지혜를 후손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을 미리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죄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악인에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악인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16절 후반부를 보시면 ‘16...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그리고 19절 후반부입니다. 19.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20절 후반부입니다. 20.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라 이렇게 악인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는 세 번 강조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 악인은?

그렇다면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 것입니까? 우리는 대개의 경우 선인과 악인을 구분할 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는 그사람을 우리는 선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남을 속이고 남의 것을 빼앗을려고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악한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이렇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합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이 선인과 악인을 쉽게 구별할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될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온전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인과 악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편 10편 4절입니다. 4.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이 바로 악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신약에서도 악인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장 28절 전반부입니다. 28.또한 그들이(악인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들이(악인들이) ...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며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선하게 살고 법을 지키며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하여 많은 공헌과 업적을 남겨놓았다 할지라도 그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악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악인은 어리석은 사람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편 14편 1절입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고 대할 때 저 사람이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선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살아가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고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한데 ‘당신은 악인이야’ 라는 말을 하면 큰일 나겠지요. 단지 이러한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안타깝고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의인의 신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이면 의인답게 생각하고 행동할수 있어야 합니다.

□ 원수의 넘어짐을 기뻐하지 말라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의인의 신분이 된 저와 여러분에게 원수의 넘어짐을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려질 때에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17.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안에는 타락한 죄성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내가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김치나 된장이 싫어지고 버터가 좋아지게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한국음식과 한국말이 미국음식과 영어보다도 더 익숙 한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옛날의 죄성이 남아서 필요할때는 거짓말을 하고 남이 잘되면 시기하고 잘못되면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불행이 내 행복이 되고 상대의 넘어짐이 나의 기쁨이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더군다나 상대방이 평상시에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사람이 넘어지고 엎드려져서 일어나지 못할 때 내 마음에 벅찬 감격 같은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오기도 합니다. 앓았던 이가 빠진 것처럼 기분이 시원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져 고통을 당할 때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나의 원수가 넘어지고 엎드러질때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 전반부입니다. "18.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이것을 보시고’ 여기서 ‘이것’ 이 무엇입니까? 그 앞절에 나오죠. ‘내 원수의 넘어짐과 엎드려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그동안 힘들게 하고 괴롭혀 왔던 그 원수같은 인물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기뻐 할때 하나님께서 이러한 나의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사람이 넘어지고 엎드러지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위해 정의를 위해서 악인을 심판하시지만 그분의 마음은 편치 않으신 것입니다. 자식을 벌주고 징계하는 부모의 마음이 편치 않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역시 편치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숙한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서 생각하고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에게 악인의 넘어짐을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 우리가 내 원수의 넘어짐을 보고 기뻐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둘째로, 악인의 진노가 나에게도 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8절 후반부입니다. 18.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그러니까 악인이 받았던 그 진노를 하나님께서 또한 나에게로 옮길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저와 여러분도 그 악인들과 똑같이 넘어지고 엎드러질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악인의 넘어짐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면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죄성을 더욱더 자극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과 경쟁하고 비교하는 의식이 이전에 비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심령이 점점 더 이기적이 되고 독선적이 되어 악인이 받았던 하나님의 그 진노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의 넘어짐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보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대할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넘어짐을 보면서 내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보다는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을 지니고 그들을 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다.

□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런데 하나님은 악인의 넘어짐을 보고 우리가 기뻐하지 않는 것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도 부러워하지 말 것을 원하십니다. 본문 19절입니다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성경은 여러 곳에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알수 있는데 하나는 악인이지만 형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세상에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이러한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언제 내 마음이 가장 상하게 됩니까?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입니까? 물론 그럴 때도 속이 상하지만 정말 속이 상할 때는 악인의 형통함을 볼 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의인은 고난을 받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악인은 잘먹고 잘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때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탄이 잘 사용하는 술책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직접 공격하여 넘어뜨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악인의 형통함을 보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분노 하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 믿음을 떠나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인이 잘되고 형통해지는 것을 볼 때 무엇보다도 우선 그것을 부러워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면 왜 악인이 잘되고 형통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가 부러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첫째로, 악인은 장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전반부입니다. 20.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장래가 없겠고’ 악인에게는 왜 장래가 없는 것입니까? 앞에 있는 16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16.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기 때문‘ 입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을 말미암아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엎드러진다는 말은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 악인은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합니까?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한 번의 재앙과 환난에도 엎드러지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엎드러진 다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저주는 바로 나에게 미래와 희망이 없다 라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금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온 나라가 황폐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절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라 서방 민주주의 국가로서 나라를 재건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대신에 희망을 가지고 전쟁터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에서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은 절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한 말처럼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 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까? 악인에게는 미래와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악인이 잘되고 형통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부러워해서는 안되는 것입니까?

둘째로, 악인의 등불은 꺼지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 후반부입니다. "20.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지금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의 눈에는 악인이 잘되고 형통해 보입니다. 악인의 등불이 빛나 보입니다. 화려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등불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등불을 보고 주변에 있는 수많은 종류의 곤충들이 몰려드는 것 처럼 그 등불을 보면서 주변사람들이 몰려듭니다. 하지만 악인의 등불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 등불이 환하고 멋지게 보이지만 잠시 후면 사라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편 37편 10절입니다. 10.잠시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잠시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그러면 왜 악인의 등불이 영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냐하면 그들에게 재앙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앙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공의롭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이 심판은 절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악인은 어떤 멸망을 받게 됩니까? 시편 9편 17절입니다. 17.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이방나라들이 그리하리로다 ‘악인들이 스올로 돌아감이며’ 악인들이 어디로 들어갑니까? 스올입니다. 스올은 음부를 말합니다. 지옥을 말합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뜨거운 유황불이 타고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목마름 속에서 고통이 지속 되어지는 곳입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자기 욕심을 따라 남을 속이며 살아가면서도 잘먹고 잘살아갈수가 있습니다. 형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수 잇습니다. 하지만 이 악인의 형통은 잠시입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악인의 등불은 꺼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 푸틴이나 북한 김정은 이와 같은 인간들이 잘먹고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등불은 잠시일뿐 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인들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어느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형과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형은 캐나다로 건너가서 밤낮 쉬지않고 부지런히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형은 엄청난 갑부가 되어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은 자기 아버지처럼 방적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독학을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동생은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그 동생은 이제 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아갈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아프리카로 건너가는 선교사길을 갑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와 의사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질병을 고치는 생활을 33년 동안 해옵니다. 그사람은 저와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데이빗 리빙스턴 선교사입니다. 이 리빙스턴 선교사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신실한 삶을 살아가다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납니다.

그런데 그당시 엄청난 거부가 되어서 세상의 모든 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그 형의 이름을 아십니까? 아무도 모릅니다. 저도 이름을 모릅니다. 아마 리빙스턴 선교사에게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형의 무덤 비문에는 뭐라고 새겨져 있을까요? “아프리카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 형 ” 이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형의 비문에 왜 이런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을까요? 제 개인적으로 이러한 의문을 가지고 형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형은 자기 동생이 세상 부귀와 세상 명예를 버리고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이세상을 떠난 이후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밝고 빛나는 영생의 축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이세상에서는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살고 있지만, 이제 이세상을 떠나게 되는 순간 지금 이 모든 것은 더 이상 누릴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인생 마지막 순간에 그 형은 자신의 동생 리빙스턴이 걸어갔던 그 삶이 진정한 축복의 길이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세상을 떠나게 되는 순간에야 동생이 걸어갔던 그 삶을 부러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비석에 ‘리빙스턴의 형‘ 이라는 내용을 새기게 했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마지막을 볼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지금 당장 내 눈에 좋아보이고 이익이 되는 것만을 따라가는 것보다는,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잘되고 형통한 것을 볼때 잠시 잠깐 이라는 생각을 먼저 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이 환하게 빛나는 등불처럼 보이고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이 그 등불 아래로 모여들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삶은 잠시 잠깐입니다. 물론 우리는 악인들이 형통해지는 것을 보면서 갈등을 가질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도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갈등을 했습니다. 시편 73편 1-3절입니다. 1.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2.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3.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이 시편을 쓴 저자는 그당시 하나님의 성전에서 찬양의 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아삽 입니다. 이 아삽은 하나님은 마음이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눈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는 하나님을 잘 섬기지 않고, 남을 속이고 나쁜 짓을 하는 악인들이 더 잘먹고 더 잘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이 아삽은 깊은 갈등을 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악인이 잘먹고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아삽처럼 고민도 하고 갈등을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당하고 바람스럽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갈등을 할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인간의 한계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지성과 우리의 머리로는 이세상에 일어나는 부당한 일을 모두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공의로우시며 공평하신 분이시다“ 라는 믿음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믿음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한 일들을 볼때마다 분노가 터지고 갈등이 생겨 나는 내 명대로 살아가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이런일이 일어나게 할 수있으신가?“ 라고 하는 분노와 의심이 생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심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 내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튀르키에의 대지진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의 전쟁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죽어가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지키며 생명의 길을 걸어갈수가 있습니다.

이 아삽 성가대 책임자가 언제 깨닫게 되고 그래서 마음의 평강을 누리게 됩니까? 시편 73편 17절입니다. 17.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인해 아삽은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왜요?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악인의 종말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선인이 어려움 중에 있고 악인이 잘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인이 잘되고 악인이 어려움에 처할수도 있습니다. 또한 선인도 잘되고 악인이 잘될 수도 있고 반대로 둘다 어려울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종말은 다른 것입니다.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흥하든지 망하든지 간에 잠시 잠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이세상의 종말 이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상의 종말이후에 선인과 악인의 길은 분명하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구분하고 분리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분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며 이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세상에서 어떠한 부조리하고 부당한 일들을 보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과 평강의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간단히 정리합니다.

오늘 본문은 특별히 악인에게 일어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자세에 대해 권면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넘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자녀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에 맞게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둘째는 악인이 당하고 있는 그 진노가 나에게로 옮겨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실패와 넘어짐을 보고 내가 기뻐하고 좋아한다면 나역시 악인의 길을 갈수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나 역시 넘어지고 실패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또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악인의 길에는 장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악인의 그 형통은 등불처럼 꺼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은 악인의 실패나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기뻐하거나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이세상을 떠나게 되는 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와 선하심을 나타내 보이신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동안 부당하고 부조리한 일을 보게 된다 할지라도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