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합당하게 행하여야 할 이유
<골로새서 1장 9-10절>
9.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우리가 무슨일을 하든지 간에 먼저 기본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들이 시합에 나가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기본이 잘 되어있을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기본이 안되어 있는데 어쩌다보니 승리를 하게 되었고 결국에 금메달을 얻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시합에 나가기 전에 오랜 시간동안 지루하고 단조롭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반복되는 기본훈련에 충실했던 선수가 시합에서 좋은 성적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운동선수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질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군인이라면 나라를 지키는 일에 힘쓰고, 학생이라면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생활에 충실한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기본적인 신앙생활에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기본적인 신앙생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아라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하며 살아가라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입니다. 골로새 교회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습니까? 사도바울이 3차 선교 여행을 할때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친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마도 골로새 지역 출신이었던 에바브라가 에베소에서 바울이 전하고 있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참고로 에베소에서 골로새 까지의 거리는 약 160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서울에서 대전 까지가 약 140킬로미터이니까 그정도 되는 거리에 에베소와 골로새가 떨어져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마일로 환산하면 약 100마일 정도의 거리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된 이 에바브라가 그후 골로새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면서 골로새 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후 많은 시간이 흘러서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떄 이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골로새 교회 소식을 전합니다. 골로새 교회 소식을 들게 된 이 바울은 그 날 부터 멈추지 않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9.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에바브라를 통해 골로새 교회 소식을 들음)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골로새 교회 소식을 들은 날부터 바울은 그치지 않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한 첫 번째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9절 후반부를 다시한번 보시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우리 믿는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가장 기본이라 할수 있습니다. 믿는 성도에 있어서 성공은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기 전까지 내 자신의 뜻을 따라 살아왔고 내가 세운 계획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어렵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사랑이시니까 추악하고 거룩한 것 중에서 어느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는 우리가 분명히 알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움과 사랑의 행위 중에서도 어느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우리는 분명히 알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룩한 내용과 사랑의 내용을 선택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어디 우리 인생이 이렇게 선과 악처럼 분명하게 분리되어 우리에게 나타납니까? 흑과 백처럼 분명하게 나누어져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두가 다 비슷 비슷한 색깔을 가진 문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아내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의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내가 딸자식의 편을 들어야 할것인가, 아니면 아들의 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 라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김 집사님의 편을 들어줘야 할것인가 아니면 박 집사님의 편을 들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을 가지고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평상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가장 먼저 그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은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말씀을 읽고 묵상해도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혜와 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9절 후반부를 다시한번 보시면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성도답게 행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만 하고 거기서 끝나버린다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왜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숨기시기 때문입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순종의 자세가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대하는 것과 맞으면 나는 순종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다면 나는 그냥 없는 것으로 처리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합당하게 행동을 하지 못할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그 말씀 앞에 순종하리라. 그 말씀대로 행하며 살리라”는 결단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심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나의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할지라도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머니의 편을 들지 않고 아내의 편을 들었고 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실 것입니다. 그 반대로 내가 어머니의 편을 들어준 경우도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선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내가 딸 자식의 편을 들어주고, 또 교회서 김 집사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여 내린 선택이라면 비록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나 아니냐 분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내가 얼마나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그리고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동기를 가지고 행동을 하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왜 우리가 주님께 합당하게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왜 우리가 주님께 합당하게 행동을 해야 합니까?
첫째,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10절 전반부입니다. 10.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을 하며 살때에 범사에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모든 일에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내가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보다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성공한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서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장 9절입니다. 9.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이 말은 “죽든지 아니면 살든지”와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바울은 그 어떤 고난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만났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2장 4절입니다. 4.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살전 2:4)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함이라’. 사도 바울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이 땅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이었고 최고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바울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왜냐하면 참된 성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곧 나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죄의 종이 되어 죄와 허물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속해 있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어둠에 속해 있던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따르며 귀신을 섬기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이 기뻐 할 때 자신도 행복하고 기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성도인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 나의 마음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8절입니다. 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롬 14:18)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의 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뿐 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고 자유함을 얻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11장 6절 전반부입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이 없이는’ 무슨일을 하든지 우리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도 믿음으로 해야 하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믿음으로 드려야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감정과 내 기분으로 따지면 속이 상해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할수 없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와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라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은 하나님은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내 자존심과 내 기분에 맞추어 편안하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내가 힘들고 어려워도 또 내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듣게 되어도 믿음으로 일을 해나간다면 하나님은 그일을 기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분이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간에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일을 시작하고 결정할 때 가장 먼저 ‘주님이 정말 기뻐하실까?’를 생각하며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이 기쁨이 되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께 합당하게 행동을 해야 합니까?
둘째로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19절 전반부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19.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여기서 ‘선한 일’이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착한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믿을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내 자신의 선한 일이나 착한 행실로 인하여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에베소서 2장 9절입니다.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나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착하고 선한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착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한 일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선한일이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내가 믿을때에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선한일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 전반부입니다. 10.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엡 2:10)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선한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우리도 역시 선한일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디도서 2장 14절입니다. 14.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딛 2:14)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자로서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을때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받은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기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착하고 선한일을 하며 살아갈 때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16.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6)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사람앞에 비치게 하는 빛이 무엇입니까? 바로 그 뒤에 나옵니다 ‘그들로(사람들이죠)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그래요 세상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평가합니까? 우리의 착한 행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행실을 보면서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의 착한 행실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그 반대로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욕하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을 받은 믿는 성도인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는 말씀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미완료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 미완료형은 영어의 현재분사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선한 열매를 맺은 것으로 끝나지 말고 지금도 계속해서 선한 일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업 현장에서 모든 일에 계속적으로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일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주님께 합당하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께 합당하게 행동을 해야 합니까?
셋째,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기 위함입니다.
본문 10절 후반부입니다. 10.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앞에 합당하게 행동하며 살아갈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책한권을 읽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성도는 누구입니까? 성경책 한번만 읽고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도입니다. 저는 그런 성도님이 제일 겁이 납니다. 차라리 성경책을 한번이라도 통독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데 딱 한번을 통독한 성도는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는 이제 하나님을 다알고 있다고 하는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여 두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이 바람직하게 변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두 번 세 번 성경책을 통독하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 성도는 점점 더 겸손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신앙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신앙의 성숙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 집 가든에 고추 씨와 양파 씨 그리고 씨 감자를 심었습니다. 심은지가 일주일이 되었지만 아직 싹도 나지 않고 있습니다. 채소 싹이 나는 것에도 이렇게 시간이 필요한데 열매를 맺을려면 얼마나 더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성숙은 채소가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 전반부입니다. 18.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그를(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주님을 아는 지식이 날로 날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한 번의 깨달음, 한 번의 경험이 우리의 신앙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갓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일어나 걷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처음에는 먹고 자고 싸는 일만 하다가 옹알이를 시작하고 뒤집기를 합니다. 그리고 기어 다니다가 마침내 걷게 되고 말도 하는 것이죠.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체험을 통해 더 성장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 라고 할 때 그 의미는 상대방과 직접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받아들이고 아는 것과 같은 체험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의 믿음은 고난을 받으며 인생의 광야를 지날 때 더욱 성장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한 만큼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고 헌신하고 있는 성도님들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예전에 힘들고 어려운 역경의 시기를 보내신 분 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섬기고 봉사하는 성숙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은 특별히 어려운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많이 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고난은 마치 채소를 성장하게 하는 유기질 비료와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채소의 줄기가 자라게 하기위해 질소 성분이 있는 유기질 비료를 줍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는 시기에는 칼슘의 성분이 있는 유기질 비료를 줍니다. 그러면 그 채소는 주인의 마음에 흡족하게 자라고 결국에는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7절입니다. 7.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 119:71) ‘이로(고난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렇게 고난을 통해 대부분의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더많이 그리고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풍랑을 만나는 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배가 흔들리고 염려와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가장 큰 불행과 가장 큰 비극은 지금 이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힘들고 고통스런 고난이 고난으로만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는 기회가 될수 있다고 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길 끝에는 내가 주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고 그리고 마침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고난이 끝나면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것에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항하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실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