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이 없음이 문제인가?
<마가복음 8장 14-21절>
1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15.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6.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7.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18.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19.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21.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지난 주에는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은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라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이후에 발생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장정만 5천명이상 배불리 먹고 열 두바구니가 남았던 사건이라고 한다면 칠병이어의 기적은 떡 7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4천명 이상 배불리 먹고 일곱 바구니가 남았던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칠병이어의 기적 사건 이 일어난 이후를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려고 하는 모습은 없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예수님은 따로 산으로 올라가시고 제자들만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칠병이어 기적 이후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몇가지 차이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개의 기적이 보여주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우리가 더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제자들이 이렇게 큰 기적을 두 번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칠병이어의 기적 사건이후에 제자들은 현장에서 먹고 남았던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리고 배를 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시작이죠. 본문 14절입니다. 14.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그래서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서로 수군 대기 시작합니다. 16절입니다. 16.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제자들은 조금 전에 떡 7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만 4천명이나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일곱 바구니가 남는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이 칠병이어의 기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더 많은 떡을 남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도 떡이 없자 제자들은 걱정하면서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눈앞에두고 말입니다.
이 두가지 기적 이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바다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시기도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지만 제자들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변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존재라 할수 있습니다. 좋은 면에 대해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문제는 변해야 할 나쁜 점들이 변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본문 앞에 나오는 11절입니다.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누가요? 맨 앞을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일처럼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시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요구합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달라. 그러면 당신을 믿겠다’ 이렇게 그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16절, 17절입니다. 16.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이세대 사람들을 보면서 탄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아픈 사람들에게는 병을 고쳐주셨지만 이러한 기적들이 예수님께 대한 신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의 이 육신적인 욕구와 필요가 채워지게 되면 신앙생활을 잘해나가게 되리라 고 생각을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고 부자가 되게 해주면 신앙생활을 잘해나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외형적인 신앙생활은 잘해나갈수 있겠지요. 하지만 참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과 내가 육신적인 축복을 누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임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을때는 제자들과 주변의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그순간이 지나고 그다음날이 되자 그들은 또 다른 기적을 경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더 이상 기적을 행하지 않게 되자 그들은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왜요? 이유는 단한가지입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원한 것은 떡이었지 예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떡이 없게 되자 걱정을 합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7절입니다. 17.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두 번이나 기적을 행하여 너희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였다. 그런데더 너희들이 떡이 없다고 걱정을 하면서 서로 수군수군하느냐. 아직도 나를 신뢰하지 못하느냐“ 그러시면서 ”너희 마음이 둔하냐“ 라고 책망하십니다. 이 말씀을 요즘 속된 표현으로 한다면 ”야 이 멍청이들아“ 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제자들은 머리가 둔한 멍청이들은 아닙니다. 어떻게 알수있나요? 그 뒤를 보시면 예수님께서 질문을 하시는데 제자들은 제대로 대답을 합니다. 19절 과 20절입니다. 19.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20.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오병이어의 기적때 몇바구니가 남았느냐? 열두바구니입니다. 그럼 칠병이어의 기적때는 몇바구니가 남았지? 일곱 바구니요. 이렇게 제자들이 제대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면 칭찬을 하셔야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1절입니다. 21.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 “아직도 모르겠니?“ 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자들은 두가지 기적의 사건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알게 하고자 했던 기적을 행하셨던 참된 내용은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을 안 것이 아니라 비본질적이고 껍데기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서 우리는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냐를 알수 있습니다. 15절입니다. 15.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지금 떡 한 개밖에 없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떡이 문제가 아니라 누룩이 문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바리새인들의 누룩‘ 이고, 또 다른 하나는 ’헤롯의 누룩‘ 입니다. 누룩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시면 누룩은 악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고전 5장 8절입니다. 8.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이렇게 누룩은 악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물론 밀가루 서말속에 들어간 누룩의 비유처럼 선한 의미에서 사용된 적도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는 악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누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보면서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누룩이 없는 순전하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예수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요 메시아라는 증거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 표적도 보여 주시지 않으십니다. 12절후반부 입니다. 12.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표적을 보여 주지 않으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미 많은 표적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이적과 말씀을 통해그서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이땅에 오신 구원자요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문제는 표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경직되고 교만한 마음이 표적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리새인들은 다윗 왕과 같은 영광스러운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낮아지시고 낮아지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왕처럼 높아지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추구하는 방향과 길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들의 틀을 만들어 놓고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의 누룩‘ 은 그들의 교만과 경직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성경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올바르고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저는 바리새인들의 경직되고 교만한 삶의 모습들을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특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나 장로들의 모습에서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누룩을 보기도 합니다. 일반 성도들보다도 오히려 목회자들에게서 더 경직되고 교만한 모습을 볼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명목하에 남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말을 강단에서나 사회에서 너무 쉽게 쏟아내고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 일수록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말보다는 격려하고 살리는 언어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교만하거나 자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바리새인들처럼 교만하고 경직한 삶을 살아가지 않도록 ’바리새인들의 누룩‘ 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임을 우리는 명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그렇다면 ‘헤롯의 누룩’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같은 내용이 기록된 마태복음 16장 6절을 보시면 헤롯의 누룩 대신 ‘사두개인의 누룩’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6절입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여기서는 헤롯의 누룩 대신에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그 의미는 같습니다. 왜냐하면 헤롯이나 사두개인들은 모두가 지극히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헤롯 대왕의 가문은 로마 황제의 위임을 받아 유대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 헤롯 아켈라오 이렇게 헤롯 대왕의 아들 세명이 그당시 유대나라를 나누어서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헤롯 왕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권력과 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좋은 예가 헤롯 안디바가 자기 동생 헤롯 빌립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유혹해 이혼하게 하고 결혼했던 일을 들수 있습니다. 이렇게 헤롯 왕들은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정욕과 권력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두개인들은 제사장 사독의 후예들이었지만 일종의 정치집단이었습니다.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정치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그당시 가장 높은 정치기관이라 할수 있는 산헤드린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내세도, 천사도, 부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종교적인 아집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사두개인들이나 헤롯집단은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욕망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할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이나 헤롯 왕들이나 사두개인들이 가진 누룩에서 볼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불신앙 입니다. 물론 그들중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참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주님이 보시기에 악했던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제자들도 마찬가지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책망하신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배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배를 타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천 명이나 배불리 먹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그 떡과 물고기를 직접 나누어 주었고, 자기들도 먹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떡이 하나밖에 없다는 현실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멍청한 놈들아” 라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면 좋아하고 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떡이 있으니까 좋아하고 환호하다가 떡이 한 개밖에 없으니까 걱정하면서 서로 얼굴만 쳐다보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이 없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문제 해결자가 되십니다. 모든 것을 가졌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없다면 내가 가진 이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없어도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을 가질 때 가지게 되는 모습입니다.
제자들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는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 버린것이 아닙니다. 보다 본질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있었던 것입니다.
떡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 육신의 배를 채우는 양식입니다. 조금더 넓혀서 적용시켜본다면 이 떡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삶의 방식과 원리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못하고, 우리가 준비를 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또 설사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걱정할 것 없다 라고 하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떡을 가져오지 않고 떡을 준비하지 못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것에 있습니다.
그옛날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루 반죽 조금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떡 반죽이 며칠이나 갔겠습니까? 먹을 양식이 금방 떨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당시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믿음은 이것입니다. ‘내게 떡은 없지만 하나님이 날마다 먹여주신다’ 이 믿음만큼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시면 자기 인생의 배낭에 떡은 없어도 믿음만은 반드시 넣어 다녔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번제로 드릴 양을 가지고 가지 않고 모리아 산을 올라갔습니다. 그때 아들 이삭이 묻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드릴 양은 어디 있나이까?’ 그때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야’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믿고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양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또 다른 이삭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부활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그 어떤 방법으로든지 아들 이삭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보십시오 극심한 흉년시기에 사렙다의 과부 집으로 보내심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엘리야 자신도, 그리고 사렙다 과부에게도 아무런 음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자기 자신과 과부의 가족이 먹을 음식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 엘리야의 믿음대로 흉년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집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블레셋의 장군인 골리앗에게로 나아갈 때 어떤 창이나 칼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골리앗을 쓰러지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문제점의 본질은 떡이 아닙니다. 떡이 부족한 것도 아니요 떡을 가져 오지 않았던 실수도 아닙니다.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지금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떡이 없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풍랑이 일어나면 풍랑이 일어난다고 걱정을 합니다. 떡이 없고 풍랑이 일어날 때 우리는 내 곁에 계신 주님께 간구하고 문제 해결을 받아야 하겠다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배낭에 먹을것이 많이 있고 또 내게 남이 부러워할 만한 것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지혜롭지 못한 멍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에 떡이 한 개밖에 없다 할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해결하실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이 있다면 많은 것을 가진 복된 인생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배낭에 내게 필요한 것들이 부족하고 없다 할지라도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내가 남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누리고 살아가고 있는 사실에 교만하고 경직된 자세로 남들을 대하기 보다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헤롯왕이나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눈에 보이는 이세상이 다 인 것 처럼 정욕과 탐욕으로만 살아가지 말고 영원한 본향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남은 생애동안 주님만이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