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나를 본받으라

Author
kgmcc
Date
2023-03-19 03:41
Views
16
본문 : 빌립보서 3장 17-21절

날짜 : 2023년 3월 19일

 

<빌립보서 3장 17-21절>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7절 전반부를 보시겠습니다.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나를 본받으라’ (following my example)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에 있습니다만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만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고전 11장 1절입니다, 1.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인류역사를 보면 사도바울처럼 이렇게 ‘나를 본받으라’ 라고 외치면서 인생을 살아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위대한 정치인들 중에서도 없고, 사업에 성공한 CEO 중에서도 없고, 그리고 종교지도자들 중에서도 이렇게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자기 자랑을 너무 많이 한다고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지만 이러한 트럼프 조차도 ’나를 본받으라‘ 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말을 할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자신이 아무리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도 자신이 늘 부족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런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한 것은 ‘너희들도 나처럼 멋지고 위대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라‘ 라는 의미가 아닌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난 주일에 잠시 살펴보았지만 그당시 빌립보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 안에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단들이 가르치는 길을 따라가면 그결과는 구원이 아닌 멸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성도들이 구원과 영생의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생명의 길을 가고 있는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보다 멋지고 위대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라고 한말이 아니라, 구원의 문제를 위해서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도 바울과 같은 말을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너희들도 나처럼 살아가기를 바란다” 이러한 말을 하며 살아갈수 있어야 합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리나라 MBC에서 제작을 해서 며칠전 3월 3일에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나는 신이다’ 라는 다큐멘터리 시리즈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MBC에서 제작했는데 왜 방송은 MBC에서 하지 않고 넷플릭스에서 했는가 하는 의문점이 생길수도 있겠습니다. 그이유는 MBC에서 방송을 하게 되면 여러 관련 단체들이 고소를 하게 되고 이것을 MBC가 감당할수 없다고 자체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넷플릭스에서 방영을 한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고소에 대해 책임을 지고 대응을 하겠다는 계약을 해서 넷플릭스에서 방영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신이다’ 라는 이 다큐멘터리 시리즈는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사이비 이단 종교를 주제로 한 8부작으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이비 종교 교주들은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JMS(정명석) 교주,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아가동산 교단, 만민 중앙교회 이재록 이러한 사이비 이단에 대해 적나라하게 그 실상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 공개된 사이비 종교 보다도 훨씬 더 많은 이단들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이단들을 깊이 들어가보면 사실 초대교회에서 발생한 이단에서부터 시작되어져 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이단은 크게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지주의자입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자와 영지주의자의 영향이 오늘날에도 교회안에 들어와 여러 종류의 이단들을 발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자기들이 율법주의자나 영지주의자 라고 말하는 성도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을 보면 초대교회 당시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의 삶을 그대로 본받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원수’ 라고 말합니다. 본문 18절입니다. 18.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이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는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지은 죄값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에 담겨있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회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좀전에 잠시 언급했듯이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무시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먼저 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율법주의자

빌립보서 3장 2절입니다. 2.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성경은 율법주의자들을 가리켜 '개들' '행악하는 자들' 그리고 ‘몸을 상해하는 자들‘ 이라고 과격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삼가라' ’조심해라‘ ’Watch out' 하라고 경고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은 선하고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은 법을 기준으로 해서 ‘옳다, 그르다‘ 라고 하는 판단을 내립니다. 예를 들어 빨간불 신호등이 켜져 있는데도 그대로 지나가면 ’옳지 않은 행동‘ 이 됩니다‘ 왜요? 빨간불 앞에서는 정지해야 하는 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법에 의해서 ’올바른 인간‘, ’올바르지 않는 인간‘ 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법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법을 지키게 되고 그리고 법을 지키고 살아야 이 사회나 이 세상이 안전하게 되고 큰 문제가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법을 끝까지 지키고 살아가면 되는데 제대로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법이 우리를 정죄합니다. “너는 법을 지키지 못했어. 그러니까 너는 틀렸어. 너는 올바른 인간이 아니야” 이렇게 우리를 정죄 합니다. 그런데 이 법이 하는 역할은 우리를 정죄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할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법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율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통과 형식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할례의 문제입니다. 그 당시 초대 교회안의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또 할례도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식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기를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이후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시로 모두 할례를 받고 살아왔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할례도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할례 받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할례를 알지 못했고, 할례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할례를 받아야 하느냐 받지 않아도 되느냐를 두고 매우 혼란스러워 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입니다. 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진심으로 믿을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의롭다 라고 인정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의롭다 인정하시면 우리는 의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한 무슨 일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 라고 인정해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되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집안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새학기 등록비를 마련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당시 학과 교수님을 찾아가 집안 사정을 이야기 하고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그 학기에 저를 근로 장학생으로 뽑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학기에는 제가 대학 등록비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닐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제가 대학교 근로 장학생이 될 만큼 모범적으로 학교 생활을 했다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당시 학과 교수님이 저를 그렇게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제가 근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보면서 “너는 의인이야. 그러므로 너는 구원을 받았어” 이렇게 인정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자들은 우리 인간이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만 할 것을 가르칩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서 우리는 올바른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신분에 맞게 선한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과 구제하는 일은 구원의 조건이 아닌 구원의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을 위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행동과 형식을 중요시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오늘날 발생하고 있는 이단들을 보면 모두가 다 이렇게 형식과 율법을 준수해야 할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법을 만들어놓고 그 법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지옥불로 떨어진다고 공갈 협박을 합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3절입니다. 3.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율법주의자들은 ‘저사람이 법(절기)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라고 하는 눈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고 비판을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조차도 상대방을 세워주고 인정해주는 것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은 이러한 율법주의적인 눈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단들은 남을 비판하는 강도가 훨씬 더 하죠.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만든 법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행동을 하면 사탄 마귀 짓을 한다면서 온갖 공갈협박을 하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법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는 구원받는다 라고 하는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럴때 오늘날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이단의 가르침에서 벗어날수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이러한 율법주의자들 뿐만아니라 또다른 이단으로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1. 영지주의자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신령하고 깨끗하며 고상한 가치가 있는 존재이지만 이 ‘육신’ 은 더럽고 악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이 ‘육신은 영혼을 가두고 있는 감옥‘ 으로 보았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육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 로 갈수 있는 길은 바로 영적인 깨닫음에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영적으로 무지한 우리 인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구원자’로서 이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인간의 육신이 너무 더럽고 악하기 때문에 잠시 육신을 빌려 입고 지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인 것을 부정 합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님은 100퍼센트 인간이요 동시에 100퍼센트 신인 존재로 가르칩니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인 것은 부정합니다. ‘영지(gnosis)’라는 말은 ‘영적인 지식’의 준말입니다. 이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구원’ 은 영적인 특별한 지식을 알게 될 때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깨닫음‘ 과 ‘지식‘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지식’ 을 알아가는 일에만 열심을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1단계, 2단계, ... 7단계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이론과 지식을 자꾸 쌓아가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자신의 신앙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해갑니다. 그래서 성경 지식은 가지고 있는데 죄 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거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바로 오늘날의 ‘영지주의자’ 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구원파와 같은 이단이 바로 이런 영지주의자의 계파라 할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었으니까 이제 우리의 영혼은 구원을 얻었다. 그리고 더럽고 추악한 이 육신은 언제가 썩고 없어질 존재이니까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 육신을 가지고 돈을 벌기 위해서 무슨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예수를 알지못하는 사람들을 전도하고 구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런식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온갖 불법을 행하면서 돈을 벌게 합니다. 이 육신으로 아무리 불법적인 일을 해도 영혼은 이미 구원받았다고 하니까 얼마나 담대하게 죄를 짓고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이 하는 사업을 보면 정상적인 법을 따르지 않고 불법적으로 운영해나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그러다보니 오래전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같은 사건이 생겼던 것입니다.

영혼과 육신을 따로 따로 놓고 보는 이 영지주의 사상이 오늘날에는 믿음과 행위를 따로 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물론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믿음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신앙의 행위에 대해선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데 뭐 구태여 힘들게 섬기고 희생을 하면서 까지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신도 귀하고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성경은 우리의 몸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 순종과 헌신이라는 문제에 부닥치게 될 때 피하고 도망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과 우리 개신교를 볼 때 대체로 로마 카톨릭은 율법주의적인 색체가 강하고 개신교는 영지주의 적인 색체가 강하다 라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년 전인 1517년에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당시 로마 카톨릭이 가지고 있었던 전통과 예식을 중요시 한 형식주의적인 신앙생활하는 것을 반대하고 내용과 이해를 강조한 것이 종교개혁의 시초라 할수 있습니다. 그당시 카톨릭 성도들은 무슨 의미인지 하나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말을 몇마디 외워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전통과 형식을 따라가는 종교 예식을 그만두고 그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개신교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인 의미를 알고 예배를 드리자는 의도는 정말 바람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500년동안 계속해서 의미와 내용을 강조하다보니까 오늘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개신교 내에서 비판하는 능력이 점점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요즘 교회 성도들을 보면 말과 이론은 굉장히 강한데 실천하는 일에는 아주 약합니다. 교회 성경공부를 어느정도까지 한 성도들을 보면 이런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교회가 사랑이 부족해’ 이것은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말은 먼저 나에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사랑이 부족해’ 라고 생각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나에게 사랑이 부족해’ 가 아니라 ‘교회가 사랑이 부족해. 저 집사가, 저 장로가, 저 목사가 사랑이 부족해’ 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장로교만 해도 갈라진 교단이 백 개가 넘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나뉘어졌습니까? 의미와 내용만을 강조하고 계속 분석하고 비판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모르면 안됩니다. 먼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식으로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님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라는 말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라고 하는 연장선에서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전통과 형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외형적으로 좀 더 잘 치장을 하고 어떻게 하면 좀더 잘 고상하고 멋지게 신앙생활을 할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아는 깨닫음(그노시스)만을 강조하다 보니까, 영적인 지식만을 강조하다보니까 이 육신의 몸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고 말한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한 이말에는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본받으라. 너희들은 형식과 전통만을 중요시하는 율법주의자나 머리와 지식으로만 깨닫는데서 그치는 영지주의자들을 본받지 말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사도바울의 삶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았던 사도바울의 실제적인 삶은 어떠했습니까?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입니다. 23.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여기서 ’그들‘ 은 교회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말을 하지만 바울은 정신없는 자들이다‘ 라고 아주 과격한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왜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19절입니다. 19.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의 신은 배요‘ ’신이 배’ 라는 말은 육신의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해나가지만 실제는 자신이 잘먹고 잘살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하늘나라가 아니라 땅의 일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땅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땅의 일도 중요하고 우리 배를 만족하게 하는 먹는 음식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살아가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이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고생할수 있습니다. 좀전에 살펴보았지만 바울은 정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자신이 너무너무 고생했다 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고생을 이렇게 많이 했으니 너희들도 나처럼 이렇게 고생해야 한다’ 는 의미에서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니까 그 자리가 매맞는 자리였고 그 자리가 몇날 며칠 잠도 못자고 굶기도 하는 그런 자리였더라. 그리고 마지막엔 감옥이더라’. 이렇게 자신이 실제로 몸으로 겪었던 일을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는 더 이상 남에게 욕먹지 않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다 고난과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물론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음으로서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을 받은 사람은 이 육신을 가지고 말씀에 순종하여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할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절망과 낙심도 생길수 있습니다. 때로는 오해도 받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나에게 주어지고 내게 맡겨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사람이 참다운 그리스도인 인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순교하기 직전에 쓴 마지막 서신서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 후서 4장 7, 8절입니다. 7.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 선한 싸움은 사실은 멋지고 고상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마라톤 선수가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믿음은 지키는 것이지 보여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13절과 14절을 보시겠습니다.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내가 해왔던 지난일들은 잘하던 못하던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요? 현재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잡기 위하여 계속 달려가는 현재의 이 삶이 바로 우리 믿는 성도들이 가져야할 신앙 자세입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몸과 영혼이 같이 포함된 신앙행위이지 육신 따로 영혼 따로가 아닙니다. 전통과 율법 따로 지식과 내용 따로가 아닙니다.

동전에 앞과 뒤 양면이 있어야 진짜 인 것 처럼 진짜 신앙인은 육신과 영혼을 모두 다 중요시하며 신앙생활을 해가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율법주의자처럼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아니면 영지주의자처럼 말로만, 감정으로만 주님을 높이는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손해가 있고 아픔과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을 지키는 신앙생활을 하는 선한싸움을 할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