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움을 기뻐하고
<골로새서 1장 24절>
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다양한 선물을 받습니다. 그 선물들 중에는 내 마음에 드는 선물도 있고 그렇지 않은 선물도 있죠. 아마도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받는 선물은 대체로 내 마음에 드는 선물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들로부터 받는 선물들도 대체로 내 마음에 드는 선물일 것이고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선물도 마찬가지로 내 마음에 드는 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받는 선물은 대부분 내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그 선물이 비싸냐 비싸지 않느냐 하는 것 보다는 먼저 내가 사랑하고 있는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가격이 얼마짜리 인가 하는 것 보다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누구보다도 내가 처한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주는 선물이 정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맞는가 라고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주시는 고난이라고 하는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믿는 자녀인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머리털 숫자까지도 셀수 있을만큼 나를 잘알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고난이나 고통을 선물로 주실때가 있습니다. 사실 고난이나 고통이라는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고난과 고통이라는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까? 이것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잘 정리하신 분 중에 c.s 루이스가 있습니다. 아마도 종종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만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축복의 포장지이다” 내용은 축복인데 고난이라고 하는 포장지로 둘러 싸여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C.S 루이스가 이런 말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상황을 통해서는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서는 말씀하지만, 고난을 통해서는 크게 외치신다. 고난은 귀가 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고난을 통해서는 크게 외치신다. 고난은 귀가 먹은 세상을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고난을 만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힘들고 고달픈 고난을 경험 했고 또 현재 고난가운데 있으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이 고난만큼이나 공평한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자면 부자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많이 배우면 많이 배운대로 못배우면 못 배운 대로 이 모든 것을 따지지 않고 고난이나 고통은 모두에게 다가 갑니다. 사람을 차별 하지 않고 공평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평해보이는 고난이나 고통에 대해 대처하고 극복해나가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각각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 원리로 해석합니다. 내가 이런 고통을 받고 살아야 할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 고난을 만나 고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전생에 이런 고통과 괴로움을 받아야 할 행동을 내가 했으니까 이번 생애에서는 그 값을 치루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숙명론적인 원리로 해석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젠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니까 묵묵히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속주의적인 방법으로 문제해결 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고통과 이 괴로움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할수 있는 방법을 찾아냅니다. 거짓말을 해서 잘못을 남에게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기기도 하면서 고통과 괴로움을 피할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고통이나 괴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가르치고 숙명론자들은 그냥 견디라 라고 말하고 세속주의 자들은 무슨 방법을 사용하든지 고통과 괴로움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고통이나 괴로움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통이나 괴로움을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전반부입니다. 24.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괴로움을 기뻐하고’ 자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괴로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괴로움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받았던 고난을 말합니다. 그래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받게 되는 괴로움을 기뻐하라"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골로새서입니다. 그러니까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쓴 서신서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직접 개척하여 세우거나 그곳에서 목회를 한 적이 없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에바브라 라는 교역자와 빌레몬 이라는 평신도인 지도자에 의해서 세워진 교회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골로새 지역 출신의 사업가이었던 빌레몬이 에베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보금을 전하고 있던 바울을 만나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후 자기가 살던 골로새 도시로 와서 교역자인 에바브라와 함께 골로새 교회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 복음을 전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바울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본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고난과 괴로움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 되어 1차 2차 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그당시 소아시아와 유럽에 여러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말로 다할수 없는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고린도 후서 11장 23-27절입니다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우리가 평생에 한번 경험하기도 힘든 일들을 바울은 수없이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 은 골로새 교회뿐 만이 아니라 바울이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에 받았던 모든 고난을 의미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4절 전반부 다시한번 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24절a) ‘괴로움을 기뻐하고’ 이 세상에 누가 괴로움을 기쁨이라고 말을 합니까?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싸이코가 아닌 정상인 이라고 한다면 그누구도 괴로움이나 고통을 기쁨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괴로움을 기쁨이라고 고백합니다. 고통을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도 바울 뿐만이 아닌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입니다.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능욕 받는 일은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을 기뻐했습니다. 누가요? 그 앞을 보시면 ‘사도들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받을때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입니다.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상황이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욕하고 박해를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할 상황은 아닌 것이죠. 사실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고 즐거워 해야할 상황이 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말아라 라고 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때는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예비고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이 예비고사에 합격을 해야만 자기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 지원서를 낼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예비고사를 치루는 학생들 중에 절반 정도는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당시에 이 예비고사에 합격을 한 수험생 이름이 적힌 합격자 명단은 발표하는 날 정해진 그 장소에 가면 볼수 있었습니다. 건물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사이즈의 흰 종이에 합격한 학생들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친구와 같이 그 장소에 가서 벽에 붙어있는 합격자 명단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제 이름은 있는데 저와 같이 갔던 친구의 이름은 거기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기뻐했겠습니까? 괴로워 했겠습니까? 절망하고 있는 친구 앞에서 제가 기뻐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친구 앞에서는 어떻게 표정 관리를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제 마음은 정말 기뻐했던 것은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기쁜일이나 행복한 일이 생기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말하지 않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고난을 만나 괴로움과 고통속에 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고난과 기쁨이 함께 사용된 구절이 18번이나 나온다고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을 보면 고난과 기쁨은 동전의 앞뒤 양면처럼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는 성도들에게 고난은 복이라고 말씀하는데 특별히 주님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 기뻐하라 라고 명령합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입니다. 29.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에게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까?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계속해서 뒤를 보시면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예수) 믿을 뿐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게 된 것은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나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같이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난 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보시면 ’또한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은혜와 고난은 동전의 앞, 뒷면 양면과 같습니다. 은혜로 인한 믿음과 고난은 동전 양면과도 같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입니다.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박해를 받으리라‘ 누가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고난을 만나 당하게 되는 괴로움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고난을 만나 겪게 되는 괴로움이나 고통이 왜 기쁨이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이시간에는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이 괴로움과 고통이 왜 기쁨이 될수 있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왜 고난을 만나 당하는 괴로움이 기쁨과 즐거움이 될수 있습니까?
첫째, 그 괴로움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 후반부입니다. 2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아직도 남겨두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다 받지 않으시고 남겨두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남은 고난을 받아야만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께서 절반은 책임을 져 주시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 나머지 절반을 채우기 위해서 착한일과 구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완전한 고난입니다. 더 이상 그 무엇이 필요하지 않고 누구나 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기만 하면 충분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서 받으신 그 고난과 죽으심이 완전한 것임을 하나님께서 인정 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것입니다. 그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외에 다른 것을 갖다가 붙이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무엇입니까? 그다음 이어지는 문장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나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받았던 고난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은 바로 나의 이 육체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가 있고 또 실천 가능합니다. 그래서 본문 후반부를 다시한번 보시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 육체에 채우노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이 육체에서 느끼게 되는 고난과 괴로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체험할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남보다 먼저 섬기고 봉사를 할 때 이 육체가 고달프고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이 육체로 채워나가는 일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7절입니다. 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골로새서 1장 18절 전반부입니다. 18.그는(예수)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라‘ 자 그러니까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되어서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성도인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받는 고난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고난입니다. 예수님과 믿는 성도는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받은 이 고난을 당신의 고난으로, 나의 이 괴로움을 당신의 괴로움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괴로움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를 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빈정거림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때문에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입니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내 이 육신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위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은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믿는 성도는 주님과 한 몸이기 때문에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주님도 힘들어하시고 괴로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당하신 주님이 나를 보시고 기뻐하고 즐거워 할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중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섬기고 봉사를 하는 일로 인하여 내 육체가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도록 하십시다.
왜 고난을 만나 당하는 괴로움이 기쁨과 즐거움이 될수 있습니까?
둘째, 주님과 친밀한 사이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힘든 시기를 지날 때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고난을 통하여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며 주님과의 친밀함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전서 4장 14절입니다. "14.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왜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고난을 받는 사람에게 임하기 때문’ 입니다. 사실 우리가 고난을 받지 않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지만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나와 함께 계심을 더욱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난속에 있을 때 우리는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밤을 만나고 인생의 풍랑을 만나면서 우리는 내게 들려오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됩니다. ‘새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제목의 찬송가를 보면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가사 내용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을 만날 때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사실 우리의 삶이 형통하고 평탄할 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모태 신앙이 아닌 대부분의 성도들은 인생의 밤을 만나고 인생의 풍랑을 만났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한숨과 탄식의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라고 생각되어지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새롭게 하소서’ 라고 하는 기독교 방송을 보면 여러 종류의 분야에서 종사하고 있는 성도들이 나와서 간증을 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그 간증을 들어보면 자기 사업이 실패했을 때, 자기 육신에 중한 병이 왔을 때 그리고 자기 가정이 파탄이 났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자신의 삶이 순탄하고 평탄할 때 주님을 만났다 라고 간증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만난 것을 대부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생의 높은 고지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한치 앞이 보이지도 않는 어둡고 캄캄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왜나하면 그럴 때 우리는 더욱더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할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말로 표현할수 없을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하루하루를 같이 경험을 하는 동안에 생겨나게 된 이 전우애는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나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때 느끼게 되는 그 친밀함은 형통하고 잘될때는 절대로 얻을수 없는 축복이라 할수 있습니다.
영국에 ‘노아의 방주(Noah's Ark Zoo Farm)’ 라는 동물원에 가면 곰과 사자 그리고 호랑이가 한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마리는 서로를 위하는 얘정이 남다르다고 합니다. 이 동물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세마리 중 어느 한 마리라도 몸이 아프면 서로를 보살펴 준다' 고 합니다. 모성애와 같은 감정을 느낄수가 있을 정도로 보살펴준다는 것입니다. 이 동물들은 어릴 때 생사를 함께하며 지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동물원에 들어오기 8년전에 불법적으로 행하고 있는 약물 시험 현장에서 함께 구조되어서 그때부터 쭉 함께 생활을 해왔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세 마리를 따로 떼어 놓을려고 했지만 서로 서로를 가족같이 여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같이 지내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공격적이고 사납기로 유명한 동물들도 자기가 죽을수도 있는 아주 열악한 환경을 만나 서로 지내게 되었을 때 생겨난 그 친밀함의 정도는 우리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거칠고 사나운 돔물들이 그렇다면 우리 믿는 성도들이 고난중에서 힘들어하고 괴로워할 때 만나주시는 주님과는 당연히 친밀한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 개인적으로도 목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울때마다 만나주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으로 인하여 이전보다도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으로 고난을 만나 고통과 괴로움 속에 있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다. 그 순간에 만나주시는 주님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나의 남은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고 모든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는 능력의 주님이 만나주시면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동안 고난중에서 만나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를 고통과 괴로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갈수가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