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대저 의인은

Author
kgmcc
Date
2023-06-18 03:40
Views
58
본문 : 장언 24장 16절

날짜 : 2023년 6월 18일

 

<잠언  24장 16절>

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오늘 본문은 ‘대저 의인은’ 이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 판단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고 우리는 “저사람은 의인이야” 라는 말을 합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속이거나 해치지 않고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도우고 정직하게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인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개념과는 다릅니다. 착하냐 착하지 않느냐, 법을 잘 지키느냐 법을 지키지 않느냐로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법과 윤리적인 눈으로 그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죠. 성경에서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기준은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가에 따라 의인과 악인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구약시대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들을 향해서 악인이요 죄인들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서 의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말씀을 따라 사는 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의인은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7절입니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복음에는‘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와 허물을 위해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으로 나의 죗값을 갚아주셨다는 소식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내가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복음 자체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악인이라 할지라도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면 그사람은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사람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의를 보시고 그사람을 죄인이나 악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뒤에 나오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몇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만 이 모든 해석들이 종합해보면 그것은 바로 앞의 나온 믿음은 “구약의 믿음”이고, 뒤에 나온 믿음은 “신약의 믿음”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는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에 이르기까지 모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어 있다” 라고 생각 할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살았던 사람이던 신약에 살았던 사람이던지 간에 그들에게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믿음의 차이를 우리는 후반부에 나오는 말씀에서 알수 있습니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믿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미하고 있죠.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천국에 들어갈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앞을 보시면 ‘기록된바....’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함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구약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구약 하박국 2장 4절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박국 2장 4절 후반부입니다. 4. ...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의 믿음(by his faith)입니다. 그런데 신약인 로마서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되어있습니다. ’그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의‘ 라는 단어가 빠졌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의 믿음’ 이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신약에서의 믿음은 ‘그의’ 가 빠졌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의 믿음은 행위로 얻게 되는 구원이라고 한다면 신약에서의 믿음은 나의 행위를 자랑할수 없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인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 와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서 그 은혜로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6절입니다. 16.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떻게 의롭게 됩니까?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의롭다” 라고 말씀 하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의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오늘날에 와서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의인 성경은 말씀합니다.

자 이제 계속해서 오늘 본문을 보시겠습니다. 16.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누가 넘어집니까? ‘의인은’ 의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고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도 넘어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두번이 아니라 일곱 번입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한 숫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 이라는 말은 횟수로 일곱 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이 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누구도 예외가 없이 수없이 넘어지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람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넘어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첫번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이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의인이라고 자랑을 했던 욥도 자기가 태어난 그 생일을 저주할 만큼 넘어졌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고 비를 내리게 해서 수백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던 능력의 엘리야도 넘어졌습니다. 이세벨을 피해 도망가다가 로뎀나무 그늘 아래에 쓰러져 자기를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만큼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었던 다윗도 여인의 유혹에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넘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넘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이것을 보면 인생은 넘어짐의 연속이다 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넘어지면서 성장하듯이 우리 인생도 넘어지면서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정상인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넘어지는 그 자체를 실패라고 우리는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넘어지는 것이 결국에 유익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비와 바람을 맞은 땅이 햇볕만 내리쬐는 사막보다 더욱더 비옥한 옥토가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비바람을 통하여 더욱 성숙해지고 모났던 부분들이 다듬어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와 넘어짐을 두려워하지 말야야 합니다. 한 두번 넘어짐으로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이 끝이 났다'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넘어지는 일은 실패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의인도 일곱 번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넘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도 넘어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의인은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16절a) 그렇다면 누가 의인입니까?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수도 없이 많이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여 넘어졌을지라도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사탄이 나를 하나님앞에 참소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지만 언제든지 넘어질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 때문에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에게 있어서 넘어짐은 마지막이 아니고 끝장이 아닙니다. 실패가 아닙니다. 의인은 다시 믿음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많으신 성도님들께서는 기억하고 계시겠지만 1977년에 주니어 페더급 세계 권투 챔피언이 되었던 홍수환 선수가 있습니다. 이 홍수환 선수가 그당시 파나마에서 헥도르 카라스키야 선수와 세계 챔피언 자리를 놓고 대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홍수환 선수가 2회에 4번이나 다운이 되었습니다. 시합을 시작하자마자 4번 다운 되었으니 그모습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그다음 3회를 넘기지 못하고 홍수환 선수가 ko로 패배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3회에 들어서자 이 홍수환 선수가 카라스키야 선수를 폭풍처럼 몰아부쳐서 상대방 선수를 ko 시키고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홍수환 선수는 4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끝까지 싸우면 승리할수 있다 라고 하는 실제적인 모본을 보여준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4번이 아니라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서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 때에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의인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무엇이 죄 입니까? 넘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보면 넘어지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넘어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 인 것입니다. 누가 인생의 성공자입니까?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넘어지고 그리고 또 수없이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십자가를 붙잡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인생의 실패자 입니까? 넘어짐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패라는 것은 넘어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커다란 실패는 다시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는 것에 있다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사람은 품에 안으시지만 포기한 사람은 버리십니다. 그러므로 넘어질 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일어나십시다. 오늘 본문은 의인과 악인과의 차이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본문 후반부입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그러니까 다시 일어나느냐, 다시 일어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의인과 악인의 차이인 것을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는 것 보다도 하나님이 우리가 일어나기를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37편 24절입니다.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 이 말씀이 기록된 시편 37편은 의인과 악인의 차이에 대해서 조목 조목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 문맥을 연결해서 이 구절을 보면 ’그는 넘어지나‘에서 ’그는’ 의인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의인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한다‘ 는 것입니다. 왜요?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손으로 붙드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은 자주 넘어지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는 것입니다. 엎드러지고 자빠진 것 같지만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사실은 넘어진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붙들고 계십니까? 엎드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왜 붙들고 계십니까? 다시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믿는 성도인 저와 여러분보다도 일어나기를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십니다. 하나님이 왜 아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습니까? 죄인인 우리를, 악인인 우리를 의인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 32절입니다.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노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세상에 의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들이요 악인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의 악인이 신약에 와서는 악인과 죄인으로 나뉘어지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지은 악한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도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 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악인인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악인과 죄인의 차이는 죄를 얼마큼 지었는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죄를 지었는가? 에 따라 악인이냐 죄인이냐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죄를 짓고 살아가면 악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죄를 짓고 살아가면 죄인이다 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강도 살인을 하면 악인이고 욕심이나 음탕한 생각을 하고 살아가면 죄인으로 구분을 합니다. 그럴수도 있겠지만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죄인과 악인이 서로 완전히 구분이 된다 라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가 예수님을 만났을때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하면 죄인이고, 자신이 지은 죄를 거부하고 살아가면 악인 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은 죄를 지어도 자기 마음에 별 고통을 받지 않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죄인은 마음속에 죄의식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게 될 때 회개로 연결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과 악인의 차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구분될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죄를 짓고 살아가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내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이 회개할 때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7.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자기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며 회개하지 않는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 보다도 회개한 한사람의 죄인을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왜요? 이 사람은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졌을때 내자신의 힘으로 일어나기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한번, 두번 넘어질때는 그래도 힘이 들어도 일어날 수 있겠지만 일곱 번, 여덟 번, 열 번, 스물번, 백번, 이백번... 계속해서 넘어지게 되면 내자신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는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곱 번 넘어진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는그 사람도 아닙니다. 수없이 넘어질때마다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시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 끝까지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악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우리를 의인으로 살아가게 하기 위하여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열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이 되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가 넘어진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내 마음에 상처를 주고 손가락질을 하게 합니다. “네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냐? 그따위로 신앙생활을 할려거든 차라리 때려 치우고 네 마음대로 살아라“ 이렇게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부추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결단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다시 일어나기 전 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붙잡고 계십니다.

마가복음 2장을 보시면 가버나움에 심한 중풍병으로 고통가운에 있던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중풍병자에게는 4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자기 친구를 낫게 해줄것이라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풍병자가 된 자기 친구를 예수님에게 데려갈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가까이 갈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붕위에 올라가 지붕에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침상에 눕혔습니다. 그리고 그 침상 네 모퉁이에 줄을 매달아 예수님이 계신 눈앞까지 내려놓았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앞에서 말씀을 하고 시는데 그때 지붕위에서부터 중풍병자가 누워있는 상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의 눈높이와 이 중풍병자가 누운 침상이 같은 높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님과 이 중풍병자의 눈이 서로 마주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순간의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입니다. 5.예수께서 그들의(4명의 친구들)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자 이 중풍병자는 왜 예수님을 만날려고 했습니까? 중풍병자의 4명의 친구들은 왜 고생 고생해서 자기의 친구를 예수님앞에 내려놓았습니까? 목적은 단 한가지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뚫고 자기 친구를 예수님앞에 내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너의 병이 낫게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락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와 네명의 친구들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예수님이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중풍병자를 어떻게 고쳐주실까 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관심있게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애타게 찾는 목적은 바로 내가 가진 문제 해결함을 받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나면 병고침을 받을려고 하고, 배가 고프고 가난하면 돈을 벌어 부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 내가 가진 이런 저런 문제 해결을 받기 위해 주님을 찾고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관심은 우리 인간이 가진 관심과는 다릅니다. 우리 인간의 영혼의 문제에 관심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문제 그리고 죄의 문제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입니다.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하나이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지니신 관심이 곧 하나님의 관심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하나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믿고 회개하여 의인이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장애물을 만나는 일을 허용하십니다. 이런 저런 문제를 만나 수없이 넘어지는 일까지도 허용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훨씬 더 원하십니다. 의인은 다시 일어날수가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붙잡아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할지라도 나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기를 나보다도 더 원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일어나십시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 내 인생이 끝장 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래서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와 가까웠던 친구들과 가족들마저 나를 포기하고 내곁을 떠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포기 하지 않고 일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지 마십시다. 그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수없이 넘어지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넘어지는 나를 향하여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시고 그래서 죄인이었지만 믿고 회개할 때 의인이 되게 해주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 남은 생애동안 이런 저런 문제와 유혹으로 말미암아 넘어질때다 다시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