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축복은
<출애굽기 33장 1-6절>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장신구를 떼어 내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겠노라 하셨음이라
6.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이번주와 다음주에는 출애굽기 33장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인데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왜 이스라엘 역사책을 보고 배워야 합니까?. 우리가 역사를 보고 교훈을 얻을려면 차라리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면서 교훈을 얻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길을 알려주는 계시의 책이라 할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이라고 하는 한 나라를 선택하시고 그 나라 사람들과 그에 따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계시하신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경을 대할 때는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우리가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하면 그냥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다윗과 같은 인물이 살아갔던 이야기로만 알게 됩니다. 자, 그렇다면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 질문에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출애굽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설명을 하는 것이 조금 더 이해를 쉽게 할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아시다 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400여년 이라는 기나긴 세월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모세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그리고 400여년 동안 애굽의 바로 왕 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마귀의 지배하에 있었던 시절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애굽왕 바로는 사탄, 마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바로왕의 압제에서 해방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애굽의 나라에 열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열가지 재앙 중 마지막 재앙을 통해서 그들을 해방시키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무엇입니까? 애굽나라 전국에 처음에 난 자식이나 첫 짐승이 죽임을 당하게 되는 재앙 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난 자녀는 그 집안을 대표합니다. 그러니까 그 집안이 망하게 되었고 애굽나라가 망하게 된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재앙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랐던 사람들입니다.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던 피가 있었던 집에는 그날밤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그 집 담벽을 그냥 넘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집에는 죽음이 없었습니다. 그날 죽었던 양을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부르고 이 사건을 유월절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었던 애굽나라의 집안에는 죽음이 있었고 그래서 마침내 애굽왕 바로가 항복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수 있도록 놓아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된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을수 있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후반부입니다. 7.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여기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진 그 피는 십자가에 매달려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9절입니다. 19.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어린 양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어린양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을 극복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수 있게 된 이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수 있는지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고 난 다음에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 전에 먼저 광야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광야를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가나안땅에 들어갈수 없는 것입니다. 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어가는 가나안땅은 바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 광야라고 하는 이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을 광야의 인생길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3장 8절입니다. 8.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말라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같이’ 이말씀은 그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한 것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인생이 같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 있을때 하나님을 시험하고 거역했지만 너희들은 원망과 불평하면서 인생을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때 출애굽 사건이 올바로 이해가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을 이러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성경을 읽게 되면 이스라엘 역사책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됩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기치 않은 일이 생겼습니다.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달이 넘어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를 기다리다가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장신구를 모아서 그것들을 녹여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는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부터 인도하여낸 신이다 라고 말하면서 금송아지 앞에서 절을 하고 예배를 했습니다. 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크게 분노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자기의 목숨을 걸고 중보의 기도를 드렸고 모세의 중보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예배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저와 여러분이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생각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첫번째 하신 말씀
1.그 땅으로 올라가라.
본문 1절입니다.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를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내가... 네 자손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 기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모두 넘어지고 실패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넘어지고 실패를 했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종 목적지는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 땅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되면 태양이 내리쬐고 물이 없는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물이 있고 숲이 있는 시내산 기슭에서 진을 치고 사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을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속으로 여기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내산 기슭이 아무리 좋아도 그곳을 떠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양 보혈의 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실패할수도 있고 넘어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와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안일하게 보이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패와 넘어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질때마다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는 안돼, 너는 이제 끝장이야” 이렇게 우리를 좌절하게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향해서 “너는 안돼, 너는 끝장이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실패하고 넘어졌을지라도 “다시 일어나 걸어가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쓰러지고 넘어졌을지라도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약속하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비록 이글거리는 뜨거운 태양이 기다리고 있고, 광야의 목마름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내가 걸어갈 때 하나님은 내 인생을 붙들어 주시고 내 인생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라고 하신 그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을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인생을 책임져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 입니다. 신앙생활은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실패의 자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안일해 보일수ㅗ 있는 그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의지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시내산 기슭을 떠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실패 했을지라도 일어나십시다. 지금 여기가 좋을지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목적지를 향하여 힘써 나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두 번째 하신 말씀
2.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본문 3절입니다. ‘3.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동행하기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내버려두신 것은 아닙니다. 2절을 보시게 되면 사자를, 즉 천사를 너희들 보다 앞서 보내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내 쫓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2절입니다. ‘2.내가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그리고 3절을 보게 되면 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자신은 너희들과 같이 동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들과 함께 동행할 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말했던 그 약속은 지키지만 나는 올라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막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롭게 출발할려고 하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보다 더 큰 충격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여 주시지 않는다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간들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여기 시내산 기슭에서 머물며 살아가는 게 훨씬 더 낫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3절 전체를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3.너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유는 간단합니다.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목이 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이 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목이 곧다고 하는 원래의 의미는 농부나 목자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소나 양을 가리켜서 하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게 되면 강퍅하고 교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지칭 할때 ‘목이 곧은 백성’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문맥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죄가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앞에서 엎드리어 예배를 드린 사건을 의미합니다. 왜 금송아지를 만들어 예배를 했습니까?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를 위하여서 입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입니다.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자기를 위한 동기가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보고 사주 관상을 보고 점장이를 찾아갑니까? 다 자기를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하는 사업이 잘되고 내가 성공할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불행을 피하고 운수 대통할수 있을까 이런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우상숭배를 하듯이 다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성도인 우리가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제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중심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중심에 와서 살아가는 사람이 제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 훈련을 받아도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오래전에 이 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섬기고 봉사했던 어느 한 자매님이 있었는데 다가오는 다음 주일이 자기 어머님이 돌아가신 날이었습니다.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세상을 떠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님이 자기 어머니를 기념하기 위해서 주일날 강대상 꽃을 만들어 바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해서라면 집에서 추모 예배를 드리고 강대상에 놓는 꽃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어야 한다고 제가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어머니를 위해서 강대상에 놓는 꽃을 만들어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더니만 그날부터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러한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했지만 아직도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산 정상에 머물려 있는 모세를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우상을 만들어 숭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는 목이 곧다는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목이 곧은 것과는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목에 힘을 주고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을 목이 곧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목이 곧은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자, 우리가 어떤 사람과 같이 동행을 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방을 믿고 신뢰할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신뢰할수 없으면 같이 동행할수 없습니다. 특별히 나에게 돈이 있고 귀한 보물이 있다면 그사람이 내 돈이나 내 보석을 가지고 도망갈까봐 같이 지낼수가 없게 됩니다. 어떻게 내가 눈을 감고 그사람과 같이 잠을 잘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도 세상 권력을 더 의지하고 사람이나 재물을 더 의지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떠게 나와 어떻게 동행할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동행할수 없다”
그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잠 아름다웠습니다. 이전에는 넘어지고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이말씀에 참 아름답게 반을을 했습니다.
어떻게 반응을 했습니까?
1.슬퍼했습니다.4절 전반부입니다. ‘4.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그들은 매우 슬퍼했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으면 뭐 어때? 천사를 보내주신다는데... 그리고 우리가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게 해주신다는데, 가나안땅에 들어가 살면 되는 것 아냐?”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인생이 가장 불행하고 슬픈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동행해주시지 않으면 축복의 삶을 누릴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슬픔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다른일로는 그렇게 서러워하고 마음 아파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있는 일에 대해선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고 마음 아파 하지도 않습니다. 입장을 바꾸어서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의 자녀가 하루는 나에게 ”나는 엄마 아빠하고 같이 살고 싶지 않아“ 라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요. 그리고 그 자녀가 오랫동안 나를 보지않고 나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간다면 부모가 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슬프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큰 고통을 가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같이 슬퍼하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말에 슬퍼했습니다,
두 번째 반응은
2. 자기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4절 계속 이어서 보겠습니다. 4.백성이 이 준엄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한 사람도 자기의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그리고 5절에 장식구를 떼어내라 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들은 순종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6.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 내니라 ‘그들의 장신구를 떼어내니라’ 그러면 왜 하나님은 장신구를 떼어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과거에 그들은 장신구를 가지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긴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앞으로 얼마든지 그 장신구를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길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장신구는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그당시 애굽의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이상 붙잡았다가는 나라가 다 망하겠다고 하는 생각에 금과 은으로 된 장신구를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급히 내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종으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난생 처음으로 만져보고 가지게 된 금은 장신구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애지중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장신구를 떼어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장신구로 인해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장신구를 떼어놓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하나님으로부터 제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다 내려놓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들은 슬퍼하는 것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장신구를 떼어냄으로서 자신들의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장신구를 떼어내야 합니다. 날마다 내 마음을 빼앗아가는 그것을 떼어내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만드는 것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이제 정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서 하나님 앞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패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약속한 곳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실패와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이글거리는 태양이 기다리고 있고 물이 없고 위험한 광야가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십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목이 곧은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이 아닌 내 중심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삶이 가장 슬픈 삶이요 가장 불행한 삶인 것입니다. 반면에 내게 주어진 삶의 환경이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요 행복한 삶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심으로 늘 하나님이 동행하게 되는 복된 삶을 누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