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가시가 왜 은혜인가?

Author
kgmcc
Date
2023-07-30 03:25
Views
175
본문 : 고린도후서 12장 7-9절

날짜 : 2023년 7월 30일

 

<고린도후서 12장 7-9절>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3가지 은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은혜는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경험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2절입니다.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리고 두 번째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전반부입니다.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은혜는 육체에 가시를 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 후반부입니다. 7. ...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내 육체에 가시를 주셨으니’ 자 사도바울이 셋째 하늘 즉 천국에 올라갔던 경험이나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계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참으로 귀한 은혜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육체의 가시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는 것입니까? 사도바울도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네게 있는 육체의 가시가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 전반부입니다.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바울이 자신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은 그것도 은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가시‘ 라는 표현은 어떤 것입니까? ’나의 육체 가운데 가시처럼 남아서 나를 계속해서 찌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나무가시가 박혀서 아파했던 경험들이 한두번은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가시를 빼지 않고 그냥 두면 어떻게 됩니까?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 아프게 할 것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가시가 박혀있는 경험은 수없이 있었습니다만 대개의 경우는 제가 어떻게 해서든지 가시를 뽑아냅니다. 한데 제 눈에 보이지 않는데 계속해서 자꾸 찔리는 듯한 느낌이 올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그 가시가 너무 작거나 아니면 이미 살속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죠. 그때는 제 아내가 바늘을 사용해서 제 살 속에 들어간 아주 작은 가시를 제거합니다. 이경우에는 가시 주변에 있는 살을 먼저 바늘로 파내고 난후에 드러나게 된 가시를 뽑아냅니다. 바늘로 가시 주변에 있는 살을 파낼때는 아프지만 그래도 일시적인 아픔이죠. 가시가 남아 있어 계속해서 나를 찌르는 것 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해서 나를 찔러 아프게 하는 육체의 가시가 어떻게 해서 은혜가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한 사도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는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눈이 잘보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신학자는 심한 편두통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질일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말을 더듬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카톨릭에서는 아마도 독신생활에서 오는 고독감 일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모두가 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고 근거가 있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될수 있습니다. 눈병이든, 편두통이든 간질이든지 간에 그것이 사람을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육체의 가시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바울과 같이 충성된 사람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늘에 들어가서 말로는 표현할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경험 했던 사람에게도 이러한 육체적 가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신령한 계시를 받았던 사람에게도 이런 육체적인 가시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을수 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에게도 고통의 가시가 주어질수가 있고 신비한 영적인 세계를 경험 한 사람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주어질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도 아니고 기도가 부족하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몸을 찌르는 가시 때문에 아픔을 가지고 매일 매일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육체적 가시가 바울에게 주어졌습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해서 바울의 육체에 가시가 주어졌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어진 육체의 가시를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믿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체에 가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첫째, 너무 교만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7절입니다. 7.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자만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자만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높아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자만할수 있는 모든 조건을 완전히 갖추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열두지파 가운데서도 자신의 혈통이 우월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베냐민 지파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적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당시 최고 학파라 할수 있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권까지 가졌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학문적으로 보나 혈통적으로보나 도덕적으로 보나 종교적으로 보나 자만할 수밖에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보아도 바울은 누구도 체험하지 못했던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천사에 이끌려서 셋째 하늘을 경험하였고 또 여러 가지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가장 많은 계시를 받은 사람중 한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장 많은 성경을 기록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때 바울에게서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 능력이 얼마나 강했든지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 있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대면 병이 나았고 귀신이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바울이 가는 곳곳마다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만할수 있는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던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오래전에 방영을 했던 ‘나홀로 집에(Home alone)’ 이라는 영화를 보신 성도님이 계실 것입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인 맥컬리 컬킨이 이 영화가 방영된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자 마약을 하다가 한때는 노숙자 신세를 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전에 브렌다 송 이라는 아시안계 미국 배우를 만나 결혼하면서 지금은 두명의 자녀를 둔 아빠와 남편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린제이 로한을 아시는 성도님들도 계실 것입니다. 페어런트 트랩(The parent trap)이라는 영화에서 1인 2역으로 나와 쌍둥이 자매의 연기를 너무 잘했습니다. 그때 저 린제이 로한을 보는 사람마다 마치 천사아이를 보는 것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 린제이 로한은 여러번의 음주 사고와 절도 행위로 감옥생활과 정신 병원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번 돈을 모두 탕진해버렸습니다. 돈이 없어 렌터 할 집도 구하지 못해 친구집에 얹혀서 살아가고 있다가 투자 은행 부사장인 베이더 삼머스와 결혼하면서 이제 겨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맥컬리 컬킨이나 린제이 로한은 어릴 때부터 너무 유명해지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다가 불행하게 된 케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도 이 두 사람들처럼 타락하는 것 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교만할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아무리 많은 것을 체험하였고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교만하여 버림을 받는 다면 바울이 가진 그 신령한 체험과 그 은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남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또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리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교만한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능입니다. 사실 교만해지고 싶어서 교만해진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가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에게 “당신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라고 말해보십시요. 굉장히 화를 낼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도 교만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싫어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겸손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가 남보다 잘되고 무엇인가 이루었다고 하면 나도 모르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 6장을 보시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 장정만 5천명 이상이 되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열두바구니가 가득차게 된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자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을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그 자리를 떠나가십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입니다. ‘15.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같은 사건이 기록된 마가복음 6장 45절입니다. 45.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가게 하시고‘ 그러니까 수많은 무리들이 ”저 예수를 우리의 임금으로 삼자“ 라고 환호할 때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을 제촉해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떠나 보내시면서 그사이에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을 각자 집으로 보내십니다. 그러니까 제자들과 수많은 무리들을 급히 따로 떼어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자 라고 환호하는 분위기에 빠지게되면 제자들이 자만하고 교만해지게 될 것은 예수님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재촉해서 그 자리를 떠나게 하고 예수님 자신도 혼자 산으로 떠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성공하고 출세할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할 때 주님은 우리 인간이 넘어지기 쉬운 위기라고 보십니다. 광야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나안땅이 목적지의 장소이요 성공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신명기 8장 12-14절입니다. “12.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누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는 것입니까?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마음이 교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교만해지는 것입니까?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게 되며 또 소유가 풍부하게 될때에’ 교만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왜 교만에 대해서 경고합니까? 목을 뻣뻣하게 세우며 살아가기 때문입니까?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잘먹고 잘살게 될때 생기는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럴 때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나이가 많은 편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느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사람들이 목이 뻣뻣하게 세우고 살아가기 때문에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아갈만하니까 하나님이 없이도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교만하다고 말씀합니다. 교만하니까 하나님 없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가시를 주실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 보다는 차라리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육체의 가시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교만하지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체에 가시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둘째, 내가 약할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되는 은혜 

본문 9절 후반부입니다. 9. ...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바울은 자신의 약한것들에 대해서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왜요?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바울은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되는 것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무엇이 은혜입니까? 주님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 것이 은혜입니다. 언제 주님의 능력이 머무는 것입니까? 내가 약할 때 주님의 능력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겸손한 것처럼 행동을 할 수는 있지만 본능적으로 겸손한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겸손한 사람도 있고 반대로 겁이 많고 소심하기 때문에 겸손하게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남과 잘 지내기 위해서 겸손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겸손하기 때문에 겸손할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 진정한 겸손이 나옵니까? 육제척인 가시로 인해서 아픔을 경험 해본 사람이 진정한 겸손을 가질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가시로 인해서 실패와 좌절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본 사람만이 겸손해질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 때문에 자신의 약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수 있게 됨었음을 깨닫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깨닫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할때 그 의미는 ”아하 깨닫게 되었습니다“ 뜻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깨닫고 알게 되는 것“ 이 바로 은혜입니다. 바울은 깨닫게 되니까 자신의 약함이, 자신의 가시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도구가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9절 전반부입니다. 9.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라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깨닫지 못하니까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이죠. 깨닫게 되면 우리도 바울처럼 기뻐하고 감사할 수가 있게 됩니다. 바울은 깨닫고 나니까 육체적인 가시가 제거되지 않았고 그래서 환경은 똑같았지만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도리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기뻐해본적이 있습니까?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해본적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서 나의 자녀가 대학시험이나 직장시험에 떨어졌다면 이것을 자랑할수 있겠습니까? 간절하게 드린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거부되었을 때 기뻐하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약한 것을 인해서 자랑하는 것도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깨닫으면 기뻐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깨닫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크게 기뻐했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도 육체적 가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시는 내가 교만해서 목소리를 높일려고 할때마다 나를 찔러서 나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이 가시는 육신적인 질병일수도 있고, 배우지 못한 학벌일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숨기고 싶은 과거의 아픔과 상처일수도 있습니다. 좋지 못한 환경일수도 있고 내 아내 내 남편이나 내 자식일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시를 가시로만 보지 마십시다. 가시속에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십시다.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 주는 은혜가 이것입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이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는 이 육신의 가시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당하신 육신의 가시와 비교할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억울함을 당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당하신 그 억울함에 비교할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배신의 아픔을 당한다 할지라도 주님이 당하신 그 배신의 아픔과 견줄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외롭고 고독하다 할지라도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외치시던 주님의 외로움과 고독함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나의 육체의 가시로 인하여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예수님이 지신 육체의 가시를 생각나게 하는 은혜로 여기며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육체에 주어진 가시가 은혜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도 간절히 기도를 해야 함. 

본문 8절입니다.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인해서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사탄의 사자라고 부를만큼 그 가시는 날마다 바울을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기도를 했습니다. 바울이 드린 세 번의 기도에 대해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세 번 기도 했다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세 번 기도했던 것을 본받기 위해서 바울도 세 번 기도했을 것이다 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바울이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둘째로는 세 번 기도했다고 하는 표현을 문자적인 해석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합니다. 세 번만이 아니라 더 많이 기도를 했는데 상징적으로 세 번 이라는 표현을 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자적인 해석이 맞느냐 상징적인 해석이 맞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적인 가시가 떠나가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육체의 가시를 만나게 되면 바울처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내게 육체적인 가시가 있어도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나에게 충분해”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기도를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맞는 것 같지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내인생에 가시가 있으면 먼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되 어떻게 하나요?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가시가 있을때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했을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응답을 받았겠습니까?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깨닫을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으로 인생의 가시가 주어질 때 가장 먼저 간절하게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깨닫음이 오게 됩니다. 이 가시가 나의 잘못 때문인지. 아니면 나를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지 깨닫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이 세 번이나 간절하게 기도를 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절 전반부입니다.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족한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그러니가 바울이 온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주신 은혜입니다. 바울을 온전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바울에게 육신의 가시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약한 상태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되고 형통하게 될 때 만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고 잘 풀리게 되는 것만을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니까 바울은 저주라고 생각했던 그 가시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할 때 강하게 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머무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되 간절히 해야 합니다. 가시는 먼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래야 나를 찌를수 있지 멀리 있으면 찌를수 없는 것입니다. 내 가까이에서 나를 찌르고 있는 가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 가시로 인해서 더 오랜 시간동안 주님앞에 기도할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깨달을수가있고 그래서 기뻐할수만 있다면 이 가시는 내게 저주와 불행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이 가시 때문에 내가 하나님앞에 겸손해질수 있고 이 가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가 있다면 이 가시는 은혜입니다. 물론 가시는 아픔이고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의 마음을 찌르고 나의 육신을 찌르는 가시 때문에 내 인생을 한탄하지 마십시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내게 주어진 이런 저런 가시는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