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더 소중한가?
<창세기 32장 13-20절>
13.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14.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16.그것을 각각 떼로 나누어 종들의 손에 맡기고 그의 종에게 이르되 나보다 앞서 건너가서 각 떼로 거리를 두게 하라 하고
17.그가 또 앞선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 형 에서가 너를 만나 묻기를 네가 누구의 사람이며 어디로 가느냐 네 앞의 것은 누구의 것이냐 하거든
18.대답하기를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하라 하고
19.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20.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제가 두주전에 야곱과 외삼촌 라반이 헤어질 때 서로 화친의 언약을 맺고 난후에 헤어지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원래 제가 가졌던 생각은 그 한 주만 설교를 할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반과 헤어지고 난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 지니고 있는 감정이 자꾸만 제 마음에 와닿아 지난주에도 야곱이 지녔던 두렵고 답답했던 그 감정과 그 문제 해결을 위해서 행동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후에도 계속 야곱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행동이 제마음에 와닿아서 이번주와 다음주까지 창세기 32장에 일어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 은혜를 나눌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문제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거나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크게 두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그 문제를 해결할 실력이 있으면 되는 것이죠. 그또 다른 하나는 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놓고 정말 진지하게 기도를 하게 되면 문제를 대하게 되는 내 마음에 변화가 오게 됩니다. 문제는 여전히 그냥 있지만, 그 문제를 대하는 내 생각과 내 마음이 예전과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의 가장 큰 능력은 기도하는 그 사람이 변화되어진다는 것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야곱이 기도를 한 후에 그의 태도가 변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13절을 보시면 아마도 야곱이 밤새도록 기도한 것 같습니다. 13절입니다. "13.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지난주에 야곱의 기도하는 패턴을 생각해보았지만 9절에서 12절까지 야곱이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두렵고 답답한 마음에 오랜 시간동안, 거의 밤새도록 기도를 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난후에 날이 밝아지자 야곱은 형 에서에게 줄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 선물을 정말 정성을 다하여 그리고 풍성하게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준비를 한 그 선물을 셋으로 나누어서 따로 따로 보냅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종들에게 형 에서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줍니다. 본문 18절입니다. "18.대답하기를(형 에서가 종에게 이게 무엇이냐 묻거든 이렇게 대답을 하라는 것이죠)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오며 야곱도 우리 뒤에 있나이다". 여기서 주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에게 사용하는 표현이 아니라 그당시 나이가 많은 어른에게 사용하는 존칭어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우리나라 단어로 가장 적합한 표현은 아마 ‘주인어른’ 이 아닐까 제 개인적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인들이나 신분이 낮은 평민들이 나이가 있으시거나 자기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을 지칭할때 많이 사용했던 단어가 ‘주인어른’ 이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면 “주인 어른께서는 요즘 건강이 어떠하십니까?” 이런식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말을 사용하는 것에 신중한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한마디 말로 천냥빚을 갚는다’ 속담도 있듯이 상대방을 최대한 존경하는 표현은 마음을 녹이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은 종들에게 형 에서를 만나면 그렇게 말하라고 다짐을 시키고 첫 번째 선물을 보냅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난후에 야곱은 두 번째 선물을 보내면서 종들에게 역시 같은 내용의 말을 하라고 다짐을 시킵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고 난 후에 세 번째 선물을 보내면서 종들에게 똑같은 말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19. 그 둘째와 셋째와 각 떼를 따라가는 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너희도 에서를 만나거든 곧 이같이 그에게 말하고’ 어떻게 말하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주인 어르신의 종 야곱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주인 어르신 인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이고 저희들의 주인이신 야곱도 뒤에서 오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종이 야곱을 보면서 ‘주인 어른’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형 에서를 볼 때 ‘야곱의 주인 어른이신 에서’ 라고 표현하라고 야곱이 종들에게 다짐시킵니다. “야곱의 형 에서가 아니라 야곱의 주인 어르신인 에서‘ 라고 표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로 이렇게 말하라는 이유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20절에 나옵니다. 20절 후반부입니다. “20.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 함이었더라’ 그러니까 형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형의 마음을 얻기 위하여 준비한 선물의 내용을 보면 굉장합니다.
본문 14절 과 15절입니다. "14. 암염소가 이 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 양이 이 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15.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 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모두 몇 마리입니까? 14절을 보시면 ‘암염소 이백 마리, 이십마리, 이백마리, 이십마리’ 그리고 15절에 ‘낙타 삼십 마리와 그 새끼들 암소 사십 마리 황소 열 마리 암 나귀 이십마리 새끼 나귀 열 마리’. 모두 합하면 5백마리도 넘습니다. 정말 엄청난 양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동안 일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많은 축복을 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야곱이 형 에서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엄청난 양의 선물들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 더 관심있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이 선물의 양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야곱이 밤을 새어가면서 기도를 한 이후에 생각과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동안 야곱은 집착을 하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붙잡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를 붙들면 절대 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후에 성장하면서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그릇을 주고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눈이 잘 안보이는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장자에게 주는 축복을 가로채고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라헬과 레아를 붙잡았습니다. 또 그후에는 외삼촌 라반 소유의 양떼와 소떼를 붙잡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가족들과 많은 가축들을 가진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누군가가 야곱에게 “당신의 좌우명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면, 야곱은 이렇게 대답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말아라” 우리나라 진돗개에게 필요한 이러한 좌우명을 가지고 인생을 살았던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살펴보면 자기손에 들어온 것을 놓아주고 포기하는 모습을 볼수 없습니다. 자기 아내인 라헬과 레아의 경우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야곱은 처음 7년동안은 품삯을 받지 않고 무료로 일을 해주는 대신에 라반의 딸 라헬을 얻기로 라반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7년째 되는 날 라반은 라헬대신에 언니 레아를 첫날밤에 방으로 들여 보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그날밤에 레아를 라반에게 데리고 가서 “외삼촌 이 여자가 아닙니다. 계약과 내용이 다릅니다” 이렇게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 다음날이 되어서 라반을 찾아가 따지는 것입니까? 그자리에서 “나는 이 여자가 레아인줄 몰랐습니다” 라고 하면 그말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그만큼 야곱은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은 놓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왔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것도 붙잡고 저것도 붙잡는, 주는 대로 다 붙잡는 그런 인생을 살아온 야곱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야곱이 기도를 하고 난후에 자기가 붙잡았던 것을 놓아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서 자기의 인생에 무엇이 더 가치가 있고 무엇이 더 귀중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더 가치가 있고 더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지금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버리고, 포기할 줄 아는 인생이 성숙한 사람이요, 변화가 된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람들은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은 포기를 했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는 일을 포기 했습니다. 왜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는 길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4절 마지막을 보시면 ‘...거절하고’ 그리고 25절 마지막에 ‘...더 좋아하고’ 그러니까 모세는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것을 거절하고 포기할 줄아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왕궁에 머물러 있는 것을 포기하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광야의 생활을 하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26절을 보시면 그일은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자기의 삶을 희생하고 섬기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서의 봉사와 성도들을 섬기는 희생을 할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섬김은 이세상의 그 어떠한 것 보다도 더 가치가 있고 귀중한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러니까 섬김과 봉사의 생활을 하다가 힘이들고 지치는 일이 생길 때 그일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인정하신다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기도생활을 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무엇이 더 중요한지 덜 중요한지 우선 가치를 알게 되어집니다. 야곱이 그렇게 붙잡았던 물질을 놓을수가 있었던 것은 그 물질보다 더 중요하고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야곱에게 있어서 더 귀하고 소중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저와 여러분도 야곱처럼 나의 인생에서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얻기 위한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물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생명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심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신의 생명을 붙들기 위해서 물질을 포기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 잡는 방법을 들어보신 성도님들이 있을 것입니다.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와 같은 과일을 손이 겨우 들어가는 병에 담아 큰 나무에 묶어 놓습니다. 그래서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가 그병에 손을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잡지 않았을 때는 잘 들어가던 유리병 입구가 바나나를 잡고 있으면 빠져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가까이 와도 원숭이는 그 병에서 손을 꺼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손에 쥔 바나나만 놓으면 자유로와 질수가 있는데, 그 바나나를 놓지 못해서 결국 사람에게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나나가 중요합니까? 자기 생명이 중요합니까?
이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나의 생명입니다. 나의 이 생명은 이 온 우주 만물을 다준다고 해도 바꿀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기도할 때 더욱 절실하게 나의 심령에 와닿게 되어집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생활을 해나갈 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할수가 있습니다. 야곱은 기도를 하고 난이후에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명이 가장 귀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그동안 자신이 붙잡고 살았던 덜 중요한 것들을 놓을수가 있었습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물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로 형 에서와의 화해입니다.
20절 후반부입니다. “20.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 주리라 함이었더라”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 함이었더라’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계속해서 자기의 물질을 붙들고 있다면, 형 에서와 화해를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기도한 후에 자기가 그동안 붙잡고 놓지 않았던 것을 놓았습니다. 그랬더니만 어떤일이 생깁니까? 형 에서가 변하여 진 것입니다. 변화가 누구에게 먼저 일어났습니까? 야곱입니다. 형 에서가 변하기 이전에 야곱이 먼저 변했습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다른 사람이 변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게 되면 내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게 되면 원수 같이 보이는 남편이나 이웃사람들이 다 이해가 되어지고 불쌍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외삼촌 라반에게 선악간에 따지지 말라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누가 맞고 누가 틀린 것을 따지지 말라 라고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화해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화해를 원하십니까? 화해를 하는 것이 더 가치가 있고 더 소중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여기신다면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화해가 더 중요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를 하고 난 이후에도 화해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더 열심을 내어서 싸우고 니편 내편 가르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정말 진정한 기도를 했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기도한 후에 야곱은 화해가 자신이 가진 물질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와 화해를 해야 자기가 고향에 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형 에서와 화해를 해야 자기의 남은 생애를 행복하게 살아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는 형과 이 화해를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붙잡고 집착하고 있었던 것 들중 많은 것을 놓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물질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물질을 얻는 것 보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야곱은 물질을 놓아버리고 화해를 붙잡았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는동안 인간관계의 문제, 가족간의 문제, 부부간의 문제, 부모 자녀간의 문제.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많은 경우에 나 자신에게 있을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 보다 다른 무엇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을 하고 붙잡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 동안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 때문에 형이 받은 상처와 아픔을 보지 못했습니다. 형의 분노만 보았지 그 상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형과의 화해를 이룰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자신이 붙잡았던 것을 놓았더니 형의 상처가, 그 아픔이 치유되었습니다. 20년 전에 야곱은 물질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물질을 붙잡았습니다. 그때는 형의 마음을 잡을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야곱은 물질을 놓음으로 인해 형의 마음을 붙잡을수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를 붙잡을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사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있는 성도들보다는 사람들과의 화해를 위해 자기가 가진 물질을 먼저 내놓는 성도님들이 휠씬더 지혜롭고 성숙한 성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 목회자들이나 직분자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도 성도들이 자신의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질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과 화해를 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을려고 하는 것보다 물질을 더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물질을 놓고 형 에서의 마음을 붙잡았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와 화해하는 것이 물질보다도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물질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셋째로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오늘 본문앞에 나오는 5절을 보시면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전에 사람을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형에서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라고 일러줍니다. "5. 내게 소와 나귀와 양 떼와 노비가 있으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알리고... "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다’ 이렇게 형 에서에게 알리라고 종에게 일러줍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나에게 재산이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20년만에 만나게 되는 형 에서에게 “나는 이런 것을 가진 부자이다” 라는 것부터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게 재산이 많이 있기 때문에 형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들다면 도와줄 수도 있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랬더니만 형 에서의 반응이 어떠했나요? 형이 좋아했나요? 400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자기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물질이나 거느리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로 따진다면 형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더 부자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하겠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재산을 다 물러 받았던 형이니까 상당한 재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가진 물질을 자랑해서는 형 에서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기도를 한 것입니다. 기도한 후에 선물을 세 번으로 나누어서 보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합니까? 다음주에 살펴보겠지만 21절부터 24절까지 보면, 야곱이 선물을 보내고, 그날 밤에 그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 그리고 그의 소유 전부를 얍복강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그리고 야곱 혼자 남게 됩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알았습니다. 자신이 붙잡아야 하는 것은 재물이 아니고, 장자권도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 때,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자신의 존재가 바뀌게 됩니다. 이전과 다른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고 그리고 인생에서 승리를 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버린다는 것은 아픔입니다. 평생 붙들고 있던 것을 포기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포기할때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보다 크고 가치가 있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생명도 포기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았습니다. 왜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입니다.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죄와 사망으로 죽었던 우리 인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해 죽으시는 예수님도 살리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입니다.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하나님이시죠)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도 살리시고 우리도 살리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의 인생에 가장 가치가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을 붙잡으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 아닌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결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앞에 여전히 형 에서가 오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면 됩니다. 그럼으로 이제 저와 여러분 덜 중요한 것은 내려놓고 더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을 붙잡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이 온세상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살리고 화목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남은 생애를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