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철없는 신앙과 철이든 신앙의 기준

Author
kgmcc
Date
2023-10-08 01:36
Views
52
본문 : 예레미야 애가 3장 32-33절

날짜 : 2023년 10월 8일

 

<예레미야 애가 3장 32-33절>

32.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우리나라 여자 역도 선수로서 유명한 장미란 선수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것입니다. 이 장미란 역도선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그당시 세계 신기록을 세우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 외에도 세계 역도 선수권 대회에서 네번이나 우승을 했고,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 1개 은메달 2개를 획득 했습니다. 이 장미란 선수가 은퇴를 한 이후에는 용인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올해 7월 달에 문화 체육 관광부 제 2차관으로 임명되어 열심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장미란 씨가 역도를 시작하게 된 것은 역도 선수 출신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강원도 상지 여자 중학교 3학년 때 부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당시에 교회를 다녔던 이 장미란씨는 자신이 여자로서 역도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교회 친구들한테는 비밀로 했습니다. 하지만 강원도내 중학생 역도대회를 며칠 앞두고 참가를 하기 전에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용기를 내어서 같은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에게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애들아 사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역도 해” 그러자 아니라 다를까 친구들이 모두 놀란 듯이 잠시 침묵을 하더랍니다. 잠시 침묵이 지난후에 친구 한명이 이렇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미란아 사실 우리들도 욕을 한단다” 평상시에 심성이 착하고 믿음이 있는 저 미란이가 어떤 일로 욕을 하고는 괴로워 하는줄알고 한마디 위로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친구들이 역도를 하는 것을 욕도 하는 것으로 잘못 알아 듣었던 것이죠. 그래서 장미란씨가 한참 망설인 끝에 욕도 하는 것이 아니고 역도를 한다고 다시 고백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보면 이렇게 상대방이 하는 말을 오해하고 들을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상대방이 하는 말을 오해하지 않고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진 본심이 무엇인가를 먼저 잘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삼대 거짓말을 잘아실 것입니다. 첫째는 노인들이 하는 말이죠. “내가 빨리 죽어야지” 두 번째는 처녀가 “나는 절대 시집을 안간다” 라는 말이고 세 번째는 장사꾼이 매일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가 밑지고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나이가 많으신 노인이 ‘내가 빨리 죽어야지.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가족들을 고생시키고 있는데 내가 빨리 죽어야지’ 라고 말하는데 그 옆에 있던 어느 신사 한분이 ‘어르신 올 한해가 다 가기전에 그 소원이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라고 말하면 무슨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노인이 굉장히 화를 낼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본심과는 다르게 말을 하고 행동을 할때가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탈리아 출신의 여자로서 한국남자와 결혼을 해 시어머니와 함께 17년동안 같이 살아가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있습니다. 크리스티나가 한국말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목소리가 크고 높아서 마치 싸움을 할 때 내는 목소리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잘알고 있는 크리스티나는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시끄러운 여자 크리스티나입니다”. 하루는 이 크리스티나가 스파게티를 맛있게 만들어서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먹을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얘들아 나는 지금 배가 부르다. 그러니 너희들이나 맛있게 먹어라” 그래서 크리스티나가 “네 어머니 배가 부르시면 먹지마세요. 제가 대신 먹을께요” 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남편이 자기를 불러서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배가 부르다” 라고 하는 말을 들어도 그래도 어머니에게 식사를 하라고 자꾸 권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처음에는 남편이 한 이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배가 부른 사람에게 먹으라고 자꾸 권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지, 어떻게 배가 부른 사람에게 자꾸 먹으라고 권해야 한다는 것이 이상했답니다. 그래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동안 시어머니의 그 숨겨진 그 본심을 알아내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크리스티나의 시어머니처럼 자기 본심과는 다른 말을 할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도 숨겨진 본심이 있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본문 33절입니다.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에게도 본심이 아니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고생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 애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저자는 물론 예레미야입니다. 애가를 풀이하면 슬픔의 ‘애‘ 와 노래 ‘가‘입니다. 예레미야가 부르는 슬픔의 노래가 바로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다면 오늘 본문이 속하는 예레미야 애가는 멸망한 예루살렘을 돌이켜보면서 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국가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고, 많은 유다 백성들이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레미아 애가 입니다. 그당시 유다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눈이 뽑힌채로 쇠사슬에 묶여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도 대부분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불에 타버린 성전을 뒤로하고 포로가 되어서 가족들과 정든 고향을 떠나 끌려갈 때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롭겠습니까? 육신적으로도 힘들고 어려웠겠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고통과 아픔은 훨씬 더 컸던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불에 타버린 저 성전을 보십시오. 전쟁으로 인해 죽어간 가족들로 인해 슬퍼하고 있는 저 백성들을 보십시오.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있는 저 사람들을 보십시오. 하나님, 보시고 듣고 계십니까?” 이렇게 그당시 유다 백성들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살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당시 유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당시 유다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에게 고통과 근심을 주는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지으면 심판하십니다. 자기 백성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심판을 하시지만 그 심판으로 인해 자기 백성이 고통과 근심중에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숨겨진 하나님의 본심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근심과 고통스러운 환경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본심을 알면서 신앙생활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인자와 긍휼입니다.

본문 32절입니다.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여기서 사용된 인자의 단어를 원어로 보면 헤세드 입니다. 이 헤세드는 언약적인 사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사랑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실수가 있고 부족함이 있고 한눈을 파는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지켜주시는 사랑이 바로 헤세드입니다. 인자입니다. 그리고 긍휼은 무엇입니까? 불쌍이 여기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징계를 받아서 고통중에서 몸부림을 칠 때 속시원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아픈 마음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키우다 보면 자녀들에게 호통을 치고 때로는 매로 때릴때가 있습니다. 왜요? 자식이 바르게 인생을 살아가게 하고 잘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부모의 본심을 모르고 “네가 이렇게 속썩일 것 같으면 차라리 집을 나가라” 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자녀가 집을 나가버리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자녀의 고통과 근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 왕과 그의 아들 므낫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하심을 볼수가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렸을 때 히스기야는 하나님앞에 통곡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15년이라는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연장받은 3년째 되던 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는 원래대로라면 이미 죽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연장받아 살게 되었고 거기다가 덤으로 아들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히스기야 왕이 이 므낫세를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생명을 연장 받았고 덤으로 아들까지 얻게 되었으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아들을 잘 키워야 하는데 히스기야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그 아들이 망나니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죽은 해인 나이 열두살때 왕이 되어서 그후 55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55년 동안 통치하면서 하나님 앞에 많은 악을 행하였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버렸던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의 제단을 다시 쌓고 하나님의 성전 마당에 일월성신을 세워놓고 온갖 잡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점치는 자와 무당과 그리고 신접하는 자를 가까이 하면서 그들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통치해왔습니다. 그리고 의롭고 바른 말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악행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므낫세는 유다 왕중에서 가장 사악한 왕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정도로 악하고 못된짓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벼락을 보내셔서 심판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55년 동안이나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징계를 내리십니다. 역대하 33장 11절입니다. 11.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 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앗수르의 군사들이 므낫세를 쇠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런데 맨앞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다음 12절 13절을 보시겠습니다. “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13.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그가 환난을 당하여’ 여기서 환난이 무엇입니까? 므낫세가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바벨론 감옥에 갇혀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중에 전쟁을 하다가 전쟁에 져서 포로가 되어 적국의 나라에 끌려간 경험을 해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므낫세는 왕의 신분에서 포로가 되었으니 그 고통과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므낫세가 이렇게 모진 환난을 당하면서 그때서야 깨닫았습니다. 그리고 그 환난속에서 므낫세는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요. 제가 교만했고 제가 타락한 행동을 했습니다. 제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요’ 므낫세는 환난을 당하면서 이렇게 절실하게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젊잖고 좋은 말을 할때 쉽게 고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아주 박살이 나야 깨닫고 변하게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 므낫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므낫세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실 이 므낫세 때문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고 이 므낫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고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므낫세는 죽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므낫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통과 근심이 아니라 인자와 긍휼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 보내신 것이 아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내 보내셨던 것입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을 위해 하나님은 인류 최초로 재봉사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을 잡아 벗긴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 허리 사이즈에 딱 맞게 재단을 하시고 그들에게 입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했기에 징계를 하셨지만 그 마음속에는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본심이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게 되면 우리가 아무리 고통과 근심속에 있다 할지라도 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징계를 받는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그래서 고통과 절망 속에 있다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고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본심은 인자와 긍휼에 있다라는 사실을 믿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평안과 미래와 희망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1절입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안이지 재앙이 아니다. 너희들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 바로 나의 본심이다”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당시 유다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먹는 음식도 아니었습니다. 평안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우상숭배와 도덕적인 타락 때문에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성전은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리고 재능이 있고 똑똑한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가족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당시 세계 최강대 국가인 바벨론을 보고 그리고 망해버린 자기나라를 볼때 그들의 마음은 불안과 염려속에서 하루하루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보다도 더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전은 불에 탔습니다. 전쟁중에 가족들은 죽기도 하고 포로가 되어 뿔뿔히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똒똑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끌려갔으니 나라에 미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길 원하신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암담하고 절망가운데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평안가운데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살아갈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권력이나 물질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명예나 성공도 아닙니다. 평안입니다. 왜요? 평안이 없는 축복은 진정한 축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와 여러분의 자녀가 하버드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서 많은 돈을 번다고 할지라도 신경 과민증에 걸려 매일같이 가족들과 불화를 일으키고 살아간다면 부모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좋은 대학 그 좋은 직장이 무슨 축복이겠습니까? 많은 돈을 벌고 있는 것이 무슨 축복이겠습니까? 자녀의 건강과 자녀의 가정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부모의 마음은 불안한 것입니다. 차라리 많이 배우지 못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평안한 가정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볼때 부모의 마음이 더 행복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평안입니다. 그리고 또 미래와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앞으로의 인생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사탄은 언제나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과거의 인생에 포커스를 맞추지만 하나님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 포커스를 맞추십니다. 사탄은 우리의 실패 우리의 연약함을 지적하고 정죄하면서 물고 늘어지지만 하나님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미래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당시 포로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미래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포로 신분에 있지만 언젠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 난후 희망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고난과 환난중에 있는 백성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은 미래와 희망에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꿈과 비젼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꿈과 비젼을 가지고 살아가시길 원하십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사람은 나이를 초월해서 언제나 꿈과 비젼을 가지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갈렙을 보십시오. 그의 나이가 85세가 되었지만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젼이 있었기에 가나안땅에서 산지가 가장 험악하고 또 거인인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 산지를 내가 정복하게 해달라고 여호수아에게 요청했습니다. 이때 갈렙의 나이가 85세이었습니다. 여기 갈렙 나이보다 더 많으신 분이 계십니까? 어떻게 해서 갈렙이 헤브론 산지를 정복할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미래와 희망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기에 주변에서 조롱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120년동안 묵묵하게 방주를 지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미래와 꿈이 있었기에 그 숱한 고난과 어려움 중에서도 끝까지 달려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그리고 미래와 희망입니다. 그럼으로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의 본심을 따라 평안을 누리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며 살아갈수 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 세 번째는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징계나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징계와 고난을 통한 성장과 성숙에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시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자신의 어린딸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와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 27절입니다.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그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있는 앞에서 직접 대놓고 이런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 할때만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있는 앞에서 사용하면 큰일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방 여인을 앞에다 두고 직접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본심일까요.? “야 너는 이방인이고 그래서 개와 같으니까 내가 음식을 못주겠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본심인가요? 아니죠. 이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본심은 이런 것입니다. ‘너는 지금 내가 개라고 하는 이 말에 너의 자존심이 아주 상하고 낙심이 되어도 나를 믿고 신뢰할수 있겠느냐?’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가지신 본심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테스트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보시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 우리를 흔드실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내 인생의 삶을 송두리채 흔들실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고통스럽고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더 가다듬어 지고 더 귀하게 쓰임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개 훈련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일스 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개를 훈련시키는 것은 개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개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하면 훈련을 잘 받은 개는 매어있지 않고 자유롭게 주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매어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게 뛰기도 하고 수영장 물에 들어가기도 하고 잔디밭에 뒹굴기도 하면서 주인의 사랑을 받으며 지낼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훈련 받지 않은 개는 쇠사슬에 묶여서 생활을 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은 개만 그런 자유를 누릴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25년 동안 흔드셨습니다. 1년 2년도 힘드는데 그 긴 25년을 흔드시고 난 다음에 약속대로 축복의 씨앗인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요셉은 또 어떻습니까? 13년을 흔드셨습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몇 년입니까? 40년을 흔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붙들고 막 흔드실때는 내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흔드실려면 나를 붙잡아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손이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꽉 붙잡아야만 막 흔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고난과 근심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시라면서 왜 우리의 인생을 흔드시고 힘들게 하시는 것입니까? 사람마다 그 이유는 다르겠지만 해결책으로 가는 길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누군가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속이 굉장히 상하게 됩니다. 남편이 내마음을 몰라주고 부모님이 내 본심을 몰라주고 내 자식이 내 마음을 몰라주면 속이 굉장히 상하고 아픕니다. 그중에서 특히 내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고 미워하면서 반항을 할 때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도록 마음이 아프고 속이 상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본심을 모르고 고난앞에서 실족하고 원망 불평할 때 그때 우리 하나님의 마음은 무너지도록 아프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본심을 알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녀가 언제 철이 들었다는 소리를 듣습니까? 자식이 부모님의 본심을 알아주고 행동을 할 때 철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사람이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이제 우리도 철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가 아닙니다. 징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과 근심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인자와 긍휼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본심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 인생의 미래와 희망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고난과 고통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성장과 성숙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심을 아는 사람은 아무리 고통 가운데 있어도 낙심하거나 절망함 속에서 살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동안 어떠한 상황속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신앙생활을 해나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