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
<베드로전서 1장 6-9절>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교해 볼 때 가장 확실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선하고 악하다고 하는 차이입니까? 아니면 잘살고 못산다고 하는 경제적인 차이인가요? 물론 이것도 저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보다 더 잘살고 인격적으로도 훨씬 더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가난하게 살고 있고,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또 거기에다가 성질마저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또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세상이 줄수 없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기쁨은 이세상에서는 얻을수 없는 소망이나 기대감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여기서 “크게 기뻐한다는 것‘ 은 헬라어로 보면 ‘아갈리아스테’ 인데 이 단어의 의미는 ‘기뻐 날뛰다’ ‘미칠듯이 기뻐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 기뻐서 미친 듯이 소리지르면서 뛰어본적이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격시험이나 취직 시험에 합격했을 때 일수도 있겠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동차나 집을 사고 난 이후에 첫날 너무 기뻐서 껑충껑충 뛴 경험이 있을것입니다. 어떤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결혼을 해달라고 하는 프로포즈를 받았을 때가 가장 기쁜 경험일수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너무 기뻐서 날뛴적이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 설문조사를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2002년 축구 월드컵 때 사건이라고 대답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탈리아와 경기할 때 1대0으로 지고 있다가 설기현 선수가 한골을 넣어 1대일 동점을 이루고 또 후반전에 안정환 선수가 역전골을 성공시켜 8강에 진출하게 된 사건을 꼽았습니다. 안정환 선수가 헤딩숫을 넣었을 때 그때는 누구라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일어나 풀쩍 풀쩍 뛰면서 대한민국사람들은 모두가 다 ‘대한민국’을 미친 듯이 큰소리로 부르며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이 미칠 듯이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크게 기뻐하는도다‘ 의 의미와 같습니다. 이 기쁨을 본문 8절에서 한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8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은 어떤것입니까? 예를 들면 복권에 당첨이 되고 멋진 차나 아름다운 집을 사거나 취직 시험에 합격을 했을 때 가지게 되는 기쁨이 바로 세상적인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성도는 이것과는 다른 것에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세상에서 오는 이런 기쁨과는 다르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 ''말할 수 없는'' 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기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너무 차원이 높고 신령해서 우리 인간의 언어로는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가지고 설명을 할려고 해도 도저히 표현 할수 없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죽어가는 자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어머니의 그 순간의 아픔을 그 누가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죽어가고 있는 아이와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아주 극한 슬픔이나 아주 극한 기쁨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로 표현할수 없기 때문에 ‘말할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은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을 믿는 자들이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입니다. “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장 13절) ‘그들로 내 기쁨을 저희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내 기쁨을 저희안에’ 예수님안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기쁨을 믿는 성도인 우리들에게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이 지니신 기쁨이 언제부터 우리 안에 생기게 되었습니까? 본문 8절 다시 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고’ 입니다.
이 영광스런 기쁨은 믿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볼수는 없습니다. ‘보지 못하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못하였지만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 없는 기쁨,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쁨은 개그맨들이 웃기는 연기를 보면서 잠시 웃는 즐거움과는 전혀 다른 기쁨인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믿는 사람에게만 있는 기쁨입니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가장 확실하게 구별시켜 주는 것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고 장기려 박사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무료로 진료해주면서 집한칸 마련하지 않고 평생을 지내오다가 하나님 품으로 갔습니다. 이분이 80회 생일을 맞이했을 때 자신이 지금까지 지내온 인생에서 경험한 세가지 기쁨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한적이 있습니다.
첫번째 기쁨은, 자신이 결혼한 이 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아들을 낳았을 때 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가진 기쁨은 온 천하를 얻은 기쁨이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기쁨은 일제 식민지 시대때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했을 때 민족감정에 의해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 기쁨은 앞에서 경험한 두가지 기쁨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크고 강한 것이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기쁨은 바로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었을때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가졌을 때 가졌던 기쁨이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의 기쁨도,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하였을 때의 기쁨도,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겸손하게 예수님 앞에 나아와 지은 죄를 고백을 하고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기쁨으로 이세상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이 기쁨은 차별이 없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육신의 부모에게 버림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업에 실패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경제적인 어려움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은 바로 믿음으로 시작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 전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 당시에 처한 배경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고난과 환난중에 있는 상황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당시 로마의 탄압과 핍박을 피해 숨어 지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불안하고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기뻐하라’ 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험과 시련이 없기 때문에 기뻐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닌 것이죠.
베드로 전서를 기록한 베드로는 이 기쁨을 언급하기 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세상에서 여러가지 시험들을 만날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헬라어를 보면 “여러 가지”라는 라는 이말은 “형형색색의” 즉 “여러 가지 색깔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그림이 수 놓아져있는 자수판의 뒷면에 여러가지 색깔의 실들이 어지럽게 얽히고 설키어 있는 것처럼 성도의 삶에도 다양한 형형색색의 시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입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은 유혹(temptation)인데 이 유혹은 내가 가진 믿음을 빼앗고 신앙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테스트’ 인데 이 테스트의 결과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 시험은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라 할지라도 이 시험은 우리들을 근심하게 합니다. 염려하게 만들고 밤에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 것 때문에 언제 잡혀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환경입니다. 특별히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의 입장이라면 그 근심의 내용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자녀들까지 위험하기 때문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슬렘 국가에서는 지금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과 같이 위험한 행동입니다. 모슬렘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되면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고 직장생활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이집트에서는 대학 교수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고 개종함으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추방당해 노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을 잃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크게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왜 우리 믿는 성도는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왜 우리 믿는 성도는 기뻐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1.상급과 축복 때문에본문 7절입니다. “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우리가 가진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아무리 작아도 믿음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원리는 금광석과 비슷합니다. 1톤짜리 광석 중에 불과 2그램의 금이 섞여 있어도 그 광석은 금광석이라 부릅니다. 1톤은 약 10만 그램입니다. 그러니까 돌덩어리속에 0.00002퍼센트가 있어도 금광석이다 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돌덩어리를 부수고 깨고 불에 녹이는 여러 가지 과정을 겪어서 마침내 1톤의 돌맹이 속에 있는 2그램의 금이 남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에도 잡다한 것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같은 시험과 연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 속에 들어 있는 많은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순수한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귀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함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여 순수한 믿음, 성숙하고 견고한 믿음을 갖게 만듭니다. 그래서 훗날에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잠깐입니다. 잠깐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시련의 끝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 라는 세 가지의 귀한 메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칭찬과 영광과 존귀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나라에서 받아 누리게 될 상급과 축복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시련이 닥치면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만 생각합니다. 처해있는 상황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시련의 끝을 보아야 합니다. 결과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시련이 나의 믿음을 성숙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라는 영광스러운 상급과 축복을 가져주기 때문에 크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왜 우리 믿는 성도는 기뻐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2.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본문 8절입니다.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그당시 이 베드로 전서를 읽고 있던 성도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직접 예수님의 모습을 본적도 없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본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를 믿었습니다. 보지 못했지만 믿었고 보지 못했지만 그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랑 때문에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항상 기쁨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 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랑하면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총각 처녀 시절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속에 기쁨이 넘칩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아보고 빙긋이 웃을 때 그것을 보는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부모가 아닌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면 기쁜데 부모님들의 기쁨은 더 할것입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이제 막 말을 배워 아빠, 엄마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또 조금 있으면 아장 아장 걷기 시작합니다. 또 온갖 재롱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런 자녀를 보면 화가 납니까? ‘너 언제 제대로 말을 하고 제대로 걸을래? 기다리고 참는데도 한계가 있다’ 이렇게 화내고 따지는 부모가 있나요? 없습니다. 아이가 넘어져도 기뻐하고 말을 제대로 못해도 기뻐하고 침을 질질 흘려도 아이를 보는 부모님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래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사랑을 하게 되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을 보세요. 어떤 사람이 크게 기뻐하며 살아갑니까? 돈이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입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내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심으로 주님안에 있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수 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우리 믿는 성도는 기뻐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3.구원의 확신 때문에본문 9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결과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것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거나 구원에 대한 의심을 하게 된다면 그 믿음은 가짜인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구원 때문에 믿음을 가지는 것이고 구원 때문에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른사람의 구원이나 구제보다 그 이전에 나의 구원 때문에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임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인 동시에 과학자이었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가 묻혀있는 묘비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바울이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원한다.” ‘나는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주신 용서를 구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기쁨은 용서받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용서함을 받았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혼의 구원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로 내가 죽음의 순간앞에 있을 때 내가 가난한 사람인가? 부자인가? 아파트에서 살았는가? 싱글하우스에서 살았는가? 학교문턱에도 가지 못한 사람인가?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인가? 이러한 내용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못하였느냐? 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 사람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 가운데서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생활해 나갑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구원받아 이세상을 떠날 때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시사 내가 진 죄값을 인해 십자가에서 생명으로 지불하신 저와 여러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하심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럼으로 남은 생애동안 예수님을 사랑하며 신앙생활해 나가십시다. 아무리 슬픔이 많고 어려움이 많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크게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확신하면 기쁨을 가지고 신앙생활해나갈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살아갈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상급을 받을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일수록 기뻐하실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