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신 세가지 선물
<디모데후서 1장 7절>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요즈음에 나오는 뉴스를 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과 그리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에 관한 소식입니다. 이러한 뉴스를 볼때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안하고 염려스럽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을 "불안함의 시대" 혹은 “두려움의 시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두 종류밖에 없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이다“ 그러니까 살아있고 제 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딱딱한 음식을 먹다가 이가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이후로부터 딱딱한 음식이나 과자를 보게 되면 먹기가 조심스러워집니다. 불안한 마음에 조심스럽게 한 개 나 두 개만 먹고 더 이상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실직에 대한 두려움 이라 할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별이나 배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런 저런 두려움 가운데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어디에서 생겨났습니까? 오늘 본문 7절 전반부 입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것’ 입니다. 오늘 본문은 디모데 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두 번째로 쓴 서신서가 디모데 후서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권면을 하고 있는 이유는 디모데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젊은 나이에 바울의 뒤를 이어서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 전서 4장 12절입니다.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누구든지 네(디모데)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연소는 나이가 적다는 의미이죠? 나이가 적다가 보니까 교회에서 업신여기고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디모데는 강직한 바울과는 달리 성격이 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한테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나면 털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의 소유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디모데를 위해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편지를 썼던 적이 있습니다. 고전 16장 10절 전반부입니다.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디모데가 오거든 너희들은 그를 조심 조심 대하라. 그래서 디모데가 두려움이 없이 거기서 사역을 할수 있도록 해라” 이렇게 바울은 평상시에 디모데를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울이 이제 감옥에 갇혀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모데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과연 이 목회를 잘 감당해나갈수 있을까? 앞으로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렇게 사역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디모데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가 가진 이런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과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과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동안 두려움을 극복하는 인생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이유는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7절 전반부를 다시 보시겠습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은 언제 어떤 이유에서 생기게 되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말라고 말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갑자기 눈이 밝아지면서 자기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최초로 경험해보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동산 나무사이로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아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처음으로 느끼게 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은 죄의 결과인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분리시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게 되어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고 멀어질때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인가하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 아이에게서 엄마를 떼어놓으면 아이는 자기가 죽는줄 알고 막 울어댑니다. 먹을 것을 주고 장난감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중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막 숨이 넘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엄마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 집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두려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생기게 될때 우리가 믿는 성도로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그다음 단계인 두려움을 극복해나가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두 번째 이유는 두려움이 현실이 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욥이 나오는데 욥은 당대의 부자이었고 의인이었습니다. 사실 부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데 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욥에게 이해할수 없는 큰 고난이 오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물이 다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장남의 집에 모여 식사를 하는데 큰바람이 불더니만 그 바람으로 인해 모든 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욥 자신은 병에 걸렸고 그 와중에 아내는 욥을 보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고 저주를 하는 일이 생깁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 왜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물론 사탄이 욥을 시험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욥이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 또 다른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욥기 3장 25절입니다.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그러니까 욥이 평상시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풍족한 재물을 주셨는데 이 재물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자녀를 주셨는데 이 자녀들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지금 내가 건강하지만 갑자기 병이 들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두려운 생각을 하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내가 두려운 생각을 가졌고 무서운 생각을 가졌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는 것이 바로 욥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욥은 평탄하고 행복한 순간에도 불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될수 있다 라고 하는 교훈을 우리는 얻게 됩니다.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로부터 부정적인 소식과 긍정적인 소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긍정적인 보고 보다는 부정적인 보고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한 것들이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겨내고 믿음을 가졌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해서는 안됩니까?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에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품고 지내면 안됩니다. 두려운 생각이 몰려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여러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오게 되면 받아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물리칠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두려움을 품으면 그것이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세 번째 이유는 두려움은 유익함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해롭기만하고 하나도 유익함이 없는 것이 두려움 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고양이 앞의 쥐’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쥐가 평상시에는 얼마나 빠릅니까? 평상시 실력대로라고 한다면 고양이를 보았을때 재빨리 도망가면 살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쥐는 고양이를 본순간 그 자리에서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굳어지고 그래서 벌벌 떨면서 기어간답니다. 그래서 잡혀죽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두려움은 우리의 신경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켜버립니다.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생활에도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깨닫아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나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부정적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커스에서 외줄을 타는 사람이 외줄을 타고 건널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제 일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밑을 내려다 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밑을 내려다 보는 순간 동시에 두려움과 무서움이 임해서 중심을 잡을수도 없게 되고 앞으로 갈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외줄을 타는 사람이 밑을 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 믿는 성도들은 두려움을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재빨리 그 생각을 다른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두려움은 흔들의자와도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흔들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많이 흔들어보십시오. 그 흔들의자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된 단어는 “사랑하라 겸손하라 섬기라” 가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성경에서 가장 많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우리 인생이 두려워하며 살아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신 말씀중에 가장 많이 하신 내용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두려움을 좋아하기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내 힘과 내 결단만으로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황청심환을 먹거나 술을 마시면 일시적으로는 두려움이 해소될지는 모르겠지만 본질적으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요?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죄의 결과로 두려움이 왔기 때문에 두려움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두려움이 생길 때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 입니까?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습니다.
본문 7절 전반부입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능력과... ” ‘오직 능력과‘ 첫째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원어로 ’디나미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시면 이 디마니스라는 단어가 사용된 경우가 여러군데 나옵니다. 시간관계상 정리해서 한마디로 설명하면 “우리 믿는 성도에게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능력은 개개인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주어진 성령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린적이 있습니다. ‘능력이란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면서 힘든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의무를 여전히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면서‘ 일단 사실을 사실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암이 걸렸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렵습니다. 그것도 사실이고 현실입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암에 안 걸렸어! 나의 사업에 부도가 나지 않았어! 이렇게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을 뛰어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을 면제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길힘을 주심으로 고난에서 승리하게 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초자연적인 능력만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은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고 이런 것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시게 되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베드로를 탈출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칼로 목베임을 당해 죽게 하십니다. 아니 똑같은 제자인데 한사람은 칼로 목베임을 당하게 하시고 또 한사람은 천사를 통해서 감옥에서 탈출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차이가 있는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으로 밖에 볼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베드로는 아직 할 일이 있고 야고보는 이땅에서 할 일을 다했다고 여기시기에 영광스러운 순교로 이땅에서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적으로 베드로가 감옥에서 나와 죽음에서 생명을 건지게 된 것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생각 합니다. 아닙니다. 만일 야고보가 타협을 했다면 목베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만 순교도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야고보는 당당하게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 전후에 반드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입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 라고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하기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고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가 나의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주기 때문에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능력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릅니다. 한시간 앞의 일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는 그 주님의 능력이 위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움에서 승리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두려움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은 사랑에 있습니다.7절 후반부를 다시 보시면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사랑과” 여기서 말씀하는 사랑은 혈육과 이성간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땅에 오셨기 때문에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발가벗김을 당하고 수치심을 당하고 욕을 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왜요?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사랑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여기서 말씀하는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임하면 두려움이 창밖으로 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과 두려움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임하면 두려움은 떠나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5절입니다. “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었을때에 주님은 성령을 우리 심령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는 것은 성령 충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받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가득차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어두움을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는 방법은 절제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이전 개혁 한글판은 근신하는 마음으로 번역되어있습니다. niv 영어성경에서는 self-discipline(자기 수양, 자기 훈련)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절제하는 마음은 자기 통제, 자기 절제의 의미가 있는 셀프 컨트롤로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판단하고 행동하는 지혜로운 마음의 상태가 바로 절제하는 마음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무엇보다도 자제력을 잃게 되고 절제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입니다. “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네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절제된 마음입니다. 위급한 상황이 닥치게 되면 사람들은 갈팡지팡 하게 되고 마음을 지킬수 없는 경우가 있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말씀이 내 심령에 거하게 되면 자신도 놀랄만큼 차분해지고 절제하는 행동을 할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 차분하게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타이탄의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 영화에서 가장 기억이 나는 장면이 무엇입니까? 여자주인공이 배 갑판 위에서서 이렇게 두팔을 벌리는 장면이 가장 기억이 나십니까? 그런데 사실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영화 마지막에 배가 침몰 할때에 일어납니다. 그때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막 고함을 치면서 정신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닙니다. 하지만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도 연주하는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악기를 놓지 않고 연주를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 드신 노부부가 침대에서 마지막으로 껴안고 죽음을 기다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는 상황속에서도 틀린 시간을 맞추고 있는 신사의 모습과 그리고 두 아이를 잠재우는 엄마의 모습이 나옵니다. 저는 이런 모습들이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항해를 하다가 언젠가는 침몰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때가 되어도 영화에 나오는 연주하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늙은 노부부처럼, 틀린 시간을 맞추는 신사와 아이를 잠재우는 엄마처럼 평상시와 같이 절제된 마음으로 행동을 할수가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주님을 만나게 되는 복된 날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려운 마음은 우리의 힘으론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과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절제된 마음만이 내인생의 배가 침몰하고 있는 중에서도 두려움을 극복하며 이겨낼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남은 생애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세가지 선물인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절제속에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