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교회에 대한 세가지 질문

Author
kgmcc
Date
2023-12-03 00:07
Views
88
본문 : 디모데 전서 3장 14-16절

날짜 : 2023년 12월 3일

<디모데 전서 3장 14-16절>

14.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산업사회가 아닌 농경 사회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장소에 정착을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대대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직장이나 사업을 따라 그리고 자녀들이 공부하기 좋은 학군을 찾아 이리 저리로 옮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대학교나 직장을 찾아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납니다. 그러다가보니까 오늘날에는 대부분 고향을 떠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방에서 자란 젊은이들은 고등학교만 마치면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직장생활을 하든지 어쨌든 다들 서울로 올라올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나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다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회학자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모두가 다 공통으로 앓고있는 질병이 있다. 그것은 바로 향수병(homesick)이다”. “향수병(Homesick) 이다“

제가 어릴적에 저희 아버님이 보증을 잘못 서시는 바람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을 빼앗기고 그후에 이리 저리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이었는데 이리 저리 옮기며 살아가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는 다른 학교로 옮기지 않고 계속 같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정든 학교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이 너무나 싫어서 제가 고집을 피워서 제 여동생과 함께 같이 걸기도 하고, 때로는 버스를 타고 같은 학교를 다녀 졸업까지 했습니다. 제 여동생도 끝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이라고 하면 옛날에 살아왔던 그 집과 그 동네가 생각이 나고 그 초등학교가 생각납니다. 오래전에 저희 누님이 한국에 간 적이 있었는데 옛날에 살았던 그 동네를 방문해서 여기 저기를 돌아다 보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옛날에 살았던 그 집이나 아니면 그 동네에 있는 집을 사고 싶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환갑이 지난 나이가 되어도 이렇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늘 그립고 안기고 싶은 어머니의 품안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옛날 사랑과 따스함 속에서 살았던 고향 집으로 돌아가 살고 싶어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시면 교회를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집은 집인데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을 살펴보면서 세가지 질문을 가지고 교회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15.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중간부를 보시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그리고 후반부를 보시면 “이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그러니까 ‘집’ 이라고 하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집입니다. 집은 집인데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니까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 대하여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많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집’ 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집‘ 이니까 이 집의 주인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집 주인의 자녀들입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입니다.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하나님도 한분이시니‘ 그러니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영적인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영적인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집의 맏아들이 되십니다. 히브리서 3장 6절입니다.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하여 이세상에서 가장 먼저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믿는 성도인 우리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어떤 면에서 볼때 하나님 아버지의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의 맏형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님은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에게 맏형님이 되시는 예수님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가족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맏형님이 되십니다. 결혼의 차원에서 본다면 신랑 신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친구의 사이가 되고 영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나의 구세주, 구원주가 되십니다. 신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성자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할때는 “예수 형님“ 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구원자 되신 주님“ 으로 부르면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교회는 집” 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교회에 올때 정말로 집과 같은 느낌을 가질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집이기 때문에 우리는 집에 온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집이라고 하는 느낌을 가지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회가 집이라기 보다는 정한 시간이 되면 모였다가 예배를 마치면 헤어지는 일에 필요한 건물이 되었습니다. 제가 서울서 대학을 다닐 때는 큰 교회에 출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는체 하는 사람도 없고 누구 하나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던 분위기 속에서 6개월 정도 예배만 드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후로 또 다른 큰 교회로 옯겨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분위기는 마찬가지 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날에는 더하면 더 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으로 봅니다. ‘집’ 이라고 하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따스함이나 사랑과는 거리가 있는 교회서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오늘날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대형교회 서너개는 선교나 큰 행사를 위해서 존재를 해야 하겠지만 그 외에는 교회들이 성도 천명이상은 넘지않는 중, 소형 교회로 나뉘어져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교제가 가능하고 그래서 가정과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교회는 집인데 하나님의 집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따스함이나 사랑이 넘치는 집이 바로 교회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지어지는 것입니까? 본문 15절 후반부입니다. “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교회는 진리로 기둥을 세우고 진리로 터를 다집니다. 아시다시피 빌딩과 같은 건물은 철근과 콘크리트로 기둥을 세웁니다. 그런데 철근과 콘크리트가 아니라 진리로 기둥을 세우고 진리로 터를 다진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빌딩이나 건물이 아니라 진리를 믿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믿는 성도들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7장 17절입니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가 기둥이 되고 터가 되어서 집을 지어가는 사람이 바로 참다운 교회를 지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게 되면 어떻게 되어집니까?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거룩하게 되어집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차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것이 곧 교회를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성도들이 거룩하지 못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심령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딩이 세워질려면 먼저 기둥이 세워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온전한 성도는 진리로 세워져야 합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을 지어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말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볼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님들은 목사님이나 장로님 그리고 집사님에 대한 말을 할때 직분이나 존칭을 생략하고 이름만을 부르면서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그 교회 목사님이나 그 장로님이나 그 집사님에 대해서 내 마음에 존경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야 어쩔수 없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나이가 있으신 분이신데 아이들을 부르듯이 이름만을 부르면서 얘기를 하는 것은 믿는 성도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입 밖으로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은 그 목사님을 세우고, 장로님을 세우고 그 집사님을 세우신 하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분들을 세우셨다면 하나님께서 훗날에 그사람과 계산을 하실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다 가나안땅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도자들을 함부로 대하고 욕을 하고 원망을 하는 바람에 여호수아와 갈렙 이외는 모두가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다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유의지로 원망하고 욕을 하는 것을 선택을 한다면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을 존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선택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는 변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광야에서 태어난 젊은이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심는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망의 말을 심으면 사망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내가 남을 살리는 생명의 말을 심으면 내가 생명의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 할지라도 나도 모르게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랍니다. 하지만 말씀을 많이 안다고 성숙한 것은 아닙니다. 밥을 많이 먹는다고 건강한것이 아니고 키가 크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많이 먹을수록 건강하고 키가 자란다면 하루에 밥을 열 번씩은 먹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키가 크고 건강해지게..., 우리가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은 그 밥을 먹고 에너지를 얻어 사람답게 살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밥의 역할은 다 한 것입니다. 내가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지 않는데 밥을 많이 먹는것은 내 건강에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말씀대로 실천하지 못하면 그 말씀이 내신앙에 장애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몰랐을때는 그냥 넘어갔던 것도 말씀을 알게 되니까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교만하고 싶어서 교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말씀을 알고 그 말씀으로 남을 판단하니까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남이 아니라 먼저 나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거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많은 성도님들이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을 봅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제 자신도 조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신도 말에 실수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마다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을 되풀이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우리 다같이 말씀 앞에서 내삶을 적용시키도록 하십시다. 요한 계시록 1장 3절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1장 3절) ‘복이 있나니’ 누가 복이 있습니까? 말씀을 읽는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입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 중에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더욱 더 많지 않습니다. 고전 3장 16절입니다. 16.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인것과’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리가 어떻게 지어져 갑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로 지어져 간다고 말씀합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져 갑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진리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리고 지켜나가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진리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셋째로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까?

본문 16절입니다.

“16.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경건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전체 문장을 보시면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가 소유한 가장 크고 경건한 비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서 비밀이 되고 있는 이 예수님 때문에 존재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믿는 성도에게 가장 큰 경건의 비밀은 바로 에수님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려야 합니까? 며칠전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에 인질 석방을 조건으로 싸움을 멈추고 잠시 휴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잠시 휴전만 해도 그장면을 보는 사람들은 잠시나마 안도감을 가지고 평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 곧 협상이 끝나면 또다시 서로 죽이고 죽는 일들이 생길텐데 지금은 잠시 잠깐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평화를 갈구하지만 현실은 여기 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세상사람들이 예수님이라는 비밀을 몰라서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나에게 알려진 비밀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시는 동안 수없이 많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비유의 말씀을 많이 하신 것입니까? 누가복음 8장 1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인 예수님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밀로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귀하신 가치를 알고 그분을 믿게 된 것이 정말 감사한 일인 것입니다.

비밀이 되신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2000년전에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리시고 부활하심으로서 우리에게 영생과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영광가운데 구름에 싸여 승천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비밀이신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요즘에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치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소식이 날마다 언론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기는 침체인데 금리도 올라서 비싼 이자를 주고 대출을 해서 집을 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집을 산 사람들도 비싼 이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매물로 내놓는 탓에 시장에 나온 집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내놓은 집들이 많으니까 하루가 다르게 집값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집을 저렴한 가격에 살수 있는 기회이다 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고 아직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지금이 집을 살만한 적당한 때인지 부동산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일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동산 전문가가 한 말을 유튜버 에서 본적이 있는데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집을 언제 사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그 집이 정말 필요한 때인가 하는 것이고 그리고 내가 그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정말 필요해서 그 집을 샀다면 나중에 그 집 가격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가장 필요한때 그 집을 사서 그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것은 경제적인 가치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성도인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가장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밀이기 때문에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정말 필요해서 그 집을 샀는데 주변 사람들이 집값이 더 떨어지고 있는데 왜 일찍 사가지고 손해를 보느냐 라고 말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경제적인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필요해서 그집을 사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것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가치와 예수님이라는 비밀을 알고 살아가고 있는 믿는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의 기준이 다릅니다.

이런 이야기가있습니다. 하루는 지혜를 가르치는 나이가 드신 스승이 자기 제자들을 모두 마당에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한 제자에게 마당에 동그라미를 그리라 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시키는 대로 막대기를 가지고 마당에 둥근 원을 그립니다. 그러자 그 스승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도 죽고 동그라미 밖에 있어도 죽는다. 어떻게 하면 너희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느냐?”

제자들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드디어 한 제자가 말합니다. “스승님 혹시 둥근 원 선을 밟고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합니다. “물이 담긴 항아리가 강물속에 있으면 그 항아리의 안도 물이요 밖도 물이다. 그러니까 그 선이 어디 있겠느냐?”

한참 시간이 지나자 어느 한 제자 하나가 걸어 나와서 동그라미 선을 두 손으로 지워버렸습니다.

그때 이 나이가 드신 스승이 만족한 모습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세상에 오셔서 그 선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선을 지우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스파이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남은 생애동안 예수님은 죽음과 사망을 없애시고 생명을 가져오신 구세주라는 비밀을 알리면서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