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수치를 벗어버리고

Author
kgmcc
Date
2024-02-18 03:40
Views
68
본문 : 요한복음 4장 27-30절

날짜 : 2024년 2월 18일

 

<요한복음 4장 27-30절>

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2022년 10월 29일 서울 이태원 거리 골목길에서 할로윈 축제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앞에 가던 사람이 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사람이 일어날 시간도 없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계속 밀면서 앞으로 나아오는 바람에 연이어서 계속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연쇄적인 깔림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압사로 죽음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서 159명이 사망하고 196명이 부상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후에 이소식을 전해들은 많은 사람들이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슬픔과 애도를 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중 소수의 사람들은 이날 할로윈 축제에 참가하여 변을 당한 사람들을 향하여 비난과 악성 댓글을 달았습니다. “서양의 축제를 왜 우리나라 사람이 따라하느냐“ 로 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할 일들이 없어서 그런 축제에 가느냐?“ “줏대 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죽어도 마땅하다“ 이렇게 이런 저런 악성 댓글이 온라인을 장식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친구들은 잃은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 친척들은 이런 악성 댓글을 보면서 더욱 더 마음에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이태원 사고에서 생존을 했던 한 학생은 이러한 악성댓글을 보면서 마음에 상처와 수치심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2000년 이후부터 이러한 악성댓글로 인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름이 있는 유명한 연예인의 숫자는 40명이 넘었습니다. 옛날에는 경제 생활에서의 어려움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면 요즘에는 이러한 악성댓글로 인해 상처를 받고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 지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우울제 약을 복용하고 심리 치료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포함한다면 악성댓글로 인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는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니까 자아가 손상 되었을 때 느끼게 되는 부정적 정서 상태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의미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와닿지는 않지만 어쨌튼 나의 이 정체성이 온전하지 못하고 손상이 된 상태임을 의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심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생물들 중에서 인간만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래요. 개와 고양이가 수치심을 느끼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강아지가 외도를 하고나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가요? 고양이가 방바닥에 똥 오줌을 쌌다고 부끄러워 합니까? 거리를 걷다가 보면 가끔 다리 아래 부분과 꼬리만 빼고 털이 다 깍인체로 돌아다니는 애완견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부끄러움 수치심도 없이 잘만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인간이 옷을 다 벗고 돌아다니면서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사람은 정상적인 상태가 절대 아닙니다. 이렇게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수 있는 감정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동물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이곳 미국이나 한국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없는 정치인들도 눈에 보입니다. 앞으로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 미국 국민들이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해서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이 없이 목소리 높이는 정치인들을 반드시 심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극소수의 사람 이외에는 대부분이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인해 우리 인간이 더욱더 성숙해지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지는 긍정적이고 유익한 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연구자인 마리 파워스가 쓴 『수치심』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잘못된 수치심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깨뜨리는 ‘감옥’이 된다. 하지만 정당한 수치심, 건전한 수치심은 도리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회복하는데 ‘영혼의 신호등’이 되어진다”. 그렇습니다. 건전한 수치심은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하여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수치심은 강박장애와 열등감 그리고 성격장애와 같은 여러 종류의 정신적 질병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생겨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보다 긍정적이고 유익한 방향으로 전환이 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하루는 다윗이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는 한 여인을 보고 시험에 들어 그여인을 불러서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자 전쟁터에 나가 있는 남편인 우리야 장군을 불러서 아내와 같이 동침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야 장군은 전쟁터에 있는 전우들을 두고 나 혼자만 집에 들어갈수 없다면서 왕궁 문에서 지냅니다. 그러자 다윗은 이 우리야를 최 전선의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만듭니다. 이러한 행위를 본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책망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로 인해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것만이 아니죠. 왕이 되기 전에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서 적국의 나라인 블레셋으로 도망을 갔는데 블레셋 왕의 신하들이 자기를 알아 보았습니다. 그때 다윗은 살아남기 위하여 침을 흘리고 미친짓을 하면서 그 위기의 순간을 넘겼습니다. 다윗에게는 이 사건이 굉장히 수치스러운 일로 마음에 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있어 자신의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수치스러운 사건이 있다면 우리야 장군을 죽게 만든 일과 적국의 나라인 블레셋에서 미친짓을 하면서 생명을 부지한 이 두가지 사건이라 할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에도 수치스러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갈바를 알지 못하고 여행을 하다가 마침내 가나안 땅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그 가나안땅에서 가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였어야 하는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기 아내를 아내라 하지 않고 누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죠. 이 얼마나 남편의 자격으로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수치스러움이 있는 사건들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도 부끄러움과 수치심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이 여인을 만나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여인을 보고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 혹은 “수가성 여인” 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셨습니다. 일부러 찾아오신 것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성경이 말씀해주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3절, 4절입니다.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그당시에 유대인들이 유대땅에서 갈릴리로 갈때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 쪽으로 이용해서 왕래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사람과 사마리아 사람들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에게 한 첫 번째 말이 이런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4장 9절입니다. 9.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가 좋지 않게 된 그 출발점은 구약시대 솔로몬 왕 이후부터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솔로몬 왕이 죽은후에 왕국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열이 됩니다. 이 북 이스라엘은 수도가 몇 번 바뀌었지만 그 대표적인 도시는 사마리아 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유다 사람들은 북 이스라엘을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나라가 분열이 된 이후부터 이 두나라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후 앗수르 나라의 정책으로 인해 그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러한 앗수르 나라의 정책으로 인해 북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혼합이 되어 원래 이스라엘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로 인해 남유다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으로 여기면서 멸시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시대를 따라 계속 지속되다보니까 예수님 당시에 서로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 도착한 시간은 정오인 낮 12시 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에서 사마리아 수가성 까지는 걸어서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짧은 거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4시간을 걸어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상황에 있었습니까?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결혼을 다섯 번을 했다가 이혼을 한 것이죠. 그리고 지금도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 남자와 동거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그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로 보았을 때 이 여자가 남자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남자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이유는 잘모르겠지만 다섯번이나 결혼을 하고 이혼을 했다면 주변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이나 존경을 받기 보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이여인은 부끄러움과 수치감을 마음 속 깊은곳에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뜨거운 대낮에 물을 얻기 위해서 우물가에 나왔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우물가에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생수에 관하여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바로 구세주요 메시야임을 드러내십니다. 26절입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내가 그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바로 그동안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메시야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 죄 많은 여인, 수치러운 여인은 구세주요 메시야이신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인생의 많은 허물을 가지고 수치심속에 살고 있던 이 여인이 물을 가지러 왔다가 구원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이 여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엇입니까? 29절 말씀입니다. “29.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예수님을 만난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온 물동이를 내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만 전한 것이 아니죠.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행한 모든일이 무엇입니까?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운 일입니다. 이것은 자랑이 아니죠?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아무도 나오지 않는 한 대낮에 물을 기르기 위해 우물가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일부러 사람들을 찾아가서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에 대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어떤 여자인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런데 나의 모든 과거를 다 알고 계시는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 어서 속히 와서 보라”

불과 몇 분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사람이 달라질 수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자신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모든 죄책감과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을 믿으면 수치심과 모든 부끄러움이 벗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 대신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와 죽음에서만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결과인 수치와 부끄러움에서도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 최초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부터입니다. 우리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는 순간부터 수치와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7절 말씀입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았더라"(창 3:7).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삼았더라” 그 이전에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죄로 인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자 그 부끄러움을 가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다음 최초로 경험하게 된 것은 바로 수치와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운 마음까지 생겨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버리게 됩니다.

이후로부터 아담의 후손인 우리 인간들은 수치심을 숨기고자 하는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에 대한 수치, 학벌에 대한 수치, 가난함에 대한 수치, 미모에 대한 수치, 몸무게에 대한 수치. 그래서 이런 저런 부끄러움과 수치심들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동산 나무사이로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나오는 수치와 부끄러움은 무화과 나뭇잎으로는 완전히 가리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숨는다고 해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을 때 무화과 나무 잎 대신에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해서 죽이고 난 후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힌 다음에 내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가죽 옷은 바로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입게 될 거룩한 의로운 옷을 상징합니다.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는 나 자신의 수치를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힌 좌편, 우편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하였고 십자가 밑을 지나가던 자들도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 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네가 정말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를 구원하여 보라” 라고 말하면서 비웃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온갖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수치와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수치와 부끄러움이 가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수치심에서 떠나 자유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한 사건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에 앞서 길갈에서 할례를 받게 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합니다. 그런데 이 길갈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수아 5장 9절입니다.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5:9)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 길갈은 40년동안 광야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맨 처음에 정착을 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 길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나라에서 430년동안 종살이 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의 수치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치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종으로 430년을 살아왔으니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런데 이 애굽의 수치가 그냥 떠나가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고 난 이후에 애굽의 수치가 떠나간 것입니다. 그 앞에 나오는 여호수아 5장 8절 전반부입니다. 8.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졌고 애굽의 수치가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길갈이 된 것입니다. 이 길갈이라는 이름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존재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를 믿고 죄를 고백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골로새서 2장 11절입니다. 11.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저와 여러분 우리는 사람의 손을 통해 육신적인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인간의 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믿고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사람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애굽의 모든 수치가 벗어진 자들이다 라고 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애굽의 모든 수치가 떠나간 새로운 피조물들 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런 저런일로 인해 내마음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일어날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게 그 어떤 수치와 부끄러움이 있다 할지라도 내가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고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았다면 내게 있는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들이 다 떠나가게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하늘에 먹구름이 사라지듯이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 여인을 보십시오. 이 여인은 그동안 수치심과 부끄러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한 순간에 벗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부끄러움과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합니까?

수치심에서 벗어진 자라야 천국의 풍요로움을 누릴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수치를 벗어나야만 가나안 땅의 풍요함을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살고 있는 원주민을 몰아내는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길갈이라는 곳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할례를 행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길갈의 뜻이 무엇입니까?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노예가 아닙니다. 질병에서의 노예도 아닙니다. 물질과 학벌에서의 노예도 아닙니다. 이런 저런 문제와 환경에서의 노예도 아닙니다. 유월절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이 벗어진 것입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풍성함을 누리며 살 수 가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이런 저런 문제와 환경에서 오는 수치심과 죄책감에서 승리하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벗어진 자라야 영적인 가나안땅인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강간범과 살인자라는 수치와 부끄러움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했습니까?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내를 팔아먹은 추잡한 놈이라는 주변 시선에 못이겨 번개탄을 피워놓고 수면제를 먹었습니까? 그들은 모두 수치심과 죄책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어나가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수치를 담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부끄러움과 수치에 대해 누가 말을 하거든 당당하게 이렇게 말을 하십시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수치심과 부끄러움에서 떠난 인생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모든 조롱을 이미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동안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고개를 들게 될 때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믿고 의지하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피로 할례를 받은 심령들마다 모두 애굽의 수치에서 떠나가는 삶을 누리며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