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

Author
kgmcc
Date
2024-04-07 00:17
Views
52
본문 : 빌립보서 3장 7-14절

날짜 : 2024년 4월 7일

<빌립보서 3장 7-14절>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오늘 본문은 빌립보서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빌립보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선교여행 기간 중에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행 16:12~40)입니다. 유럽에서 생겨난 최초의 교회입니다. 이러한 빌립보교회 안에 그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기독교 복음의 신앙을 상당히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율법주의자들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반도덕주의자들 혹은 자유주의자들의 영향도 빌립보 교회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기록된 빌립보서 3장에는 율법주의자들과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있는 반도덕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을 경계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율법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가르치는 내용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삶을 살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를 다른말로 ‘기쁨의 편지’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장수로는 4장 밖에 되지 않지만 ‘기쁨’이라는 단어가 13번 이상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빌립보서 1장 4절입니다. 4.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빌립보서 2장 4절입니다. 4.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립보서 4장 4절입니다.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떻게 하다 보니 전부 4절만 찾아보게 되었네요.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쓴 곳은 바로 로마 감옥에서 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골로새서를 감옥에 갇혀있을 때 쓴 편지라고 해서 옥중서신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도바울이 처해있는 현실을 보면 기뻐할수 있는 환경은 아닌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기뻐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알지 못하는 가장 고상한 지식은 무엇입니까? 본문 8절 전반부입니다.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고상한 것은 예수를 아는 지식이라 할수 있습니다. 왜요? 그 다음 9절입니다. 9.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로운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구원받고 하늘나라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고 선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한다면 ’사람으로부터 난 의‘ 라고 말할수 있겠죠. 이 ‘사람으로부터 난 의‘를 성경에 나오는 다른말로 표현하자면 ’율법으로부터 난 의’ 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율법을 완전하게 지킴으로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가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렇게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는다 라고 가르칩니다. 틀린말은 아닙니다. 이치에 맞는 말이고 지극히 당연한 진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은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수만 가지 율법을 잘 지키다가도 하나를 어기게 되면 그날로부터 죄인이 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하는 역할은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0절입니다.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까 율법은 마치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어떤 역할입니까? 거울은 나의 모습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내 얼굴에 무엇이 묻어있거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으면 거울은 그대로 다 보여줍니다. 하지만 거울은 문제를 알게는 해주지만 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내 얼굴이나 머리카락을 거울이 바르게 고쳐주지는 못합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은 나에게 문제가 있고 나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내가 하이웨이에서 시속 70마일 달리고 있는데 시속 60마일 스피드 한계 사인판을 보았습니다. 그 스피드 한계 사인판을 보기전에는 내가 문제를 알지 못했지만 그 사인판을 보고 난 이후에는 내가 교통 도로법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은 거울처럼 내가 문제가 있고 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하지만 그 죄를 고쳐주지는 못합니다. 죄를 고쳐주지 못하니까 당연히 의롭게 해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그래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통해서는 우리 인간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한 의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1절입니다. 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그렇다면 ‘하나님으로 부터 난 의“ 는 무엇입니까? 그다음 로마서 3장 23절과 24절입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십자가 사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자 되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의 값을 지불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인정받고 구원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의‘입니다. 우리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고 죽게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자신의 아들 예수의 죽음이 없이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었기에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1절 후반부입니다. 21. ...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율법은 인간의 의이고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 의 라 할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그당시에 초대 교회에 들어왔던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 반대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자유주의자나 혹은 반 도덕주의자들의 가르침도 동시에 반박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것임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이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율법주의자나 그 반대편인 반도덕적인 삶과 자유자의 삶의 유혹을 극복하며 살아가게 해주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고 고상한 것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새로운 셀폰을 구입했습니다.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셀폰은 제가 트레이드했기 때문에 삼성회사에 주었습니다. 그 셀폰은 어제까지 내게 없어서는 안되는 셀폰이었습니다. 하지만 미련없이 저는 삼성 회에 보낼수 있었습니다. 왜요? 내게는 훨씬 성능이 좋은 새로운 셀 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더 낫고 더 좋은 것이 있다면 그 보다 못한 것은 버릴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고상하고 가치가 있는 분으로 확신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이외는 아무리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보다는 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가 있는 분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고상하고 가치가 있는 분으로 믿고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고상하게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일이 생기는 것인가에 대하여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1.기뻐하는 삶을 산다

1절 전반부입니다. 1.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끝으로’ 라는 이 표현을 다른말로는 ‘마지막으로‘ 라고 바꾸어 볼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별로 관심이 없이 지나쳤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니까 잘 들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산만한 분위기에서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학생들이 집중해서 잘 듣게 하기 위해서 이 ’끝으로’ “마지막으로” 라는 말을 사용할수 있습니다. 그럴때는 학생들이 정신을 집중하는 경우가 많죠. 왜요? 수업이 다 끝나가는구나 하는 기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끝으로” “마지막으로” 라고 말씀하시면 성도님들의 눈에 생기가 돕니다. “야 이제 설교가 곧 끝나는 모양이다“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더 집중해서 들으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첫째, 둘째, 그리고 셋째로 라고 말할 때는 ”마지막 셋째로“ 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끝으로“ 라고 표현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안에서 기뻐하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 바깥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기뻐하라‘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남보다 더 좋은 조건과 환경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바울은 ’나는 힘들고 괴롭게 생활하고 있지만 너희들 만큼은 기뻐하라‘ 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기뻐하고 있는 것 처럼 너희들도 나처럼 기뻐하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8절입니다. 18.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나와 함께 기뻐하라‘

이것을 볼 때 바울은 자기 자신이 먼저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조건, 좋은 환경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안에 있을 때 기쁨이 주어지는 것임을 바울을 통해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물론 보다 좋은 조건과 더 나은 환경에 있으면 기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일에 보다 유리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리기를 할때나 수영 경기를 할 때 출발을 남보다 조금 더 빨리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출발하는 선수가 더 유리합니다. 하지만 먼저 출발한 사람이 반드시 1등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은 늦게 출발한 선수가 앞선 선수를 따라잡고 1등으로 골인 했을 때 입니다. 처음으로 출발한 사람이 나중이 되기도 하고 나중에 출발한 사람이 먼저가 되기도 합니다. 먼저 출발했는데 마지막엔 뒤에 처져 들어오게 되면 참 불행한 일이라 할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세상적인 면에서 보면 남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남보다 출발이 빨랐던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5절입니다.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나는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시입니다. 바울은 태어난지 팔일만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도장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태어난 신앙적인 환경이 좋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자신이 태어났는데 자기 부모님이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에 의해서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굉장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저는 대학교에 다닐 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태어난지 8일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이 얼마나 출발이 빠릅니까? 그리고 또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의 족보가 있다는 의미이죠.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왕이 사울이었는데 이 사울왕이 바로 베냐민 지파이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부심이 있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란 이방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혈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당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가장 존경을 받는 신분이 바로 바리새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6절 후반부입니다. 6....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렇게 바울은 남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과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조건과 환경이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좋은 조건과 환경이 행복과 기쁨을 보장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열악하고 좋지 않은 조건이나 환경이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다운 기쁨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감옥안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기쁨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감옥 안이냐 감옥 밖이냐가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이냐 예수 그리스도 바깥이냐가 바로 구원을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보십시오. 스데반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예수님안에 있었기 때문에 죽어가는 순간에도 기뻐할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현장에는 바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선 사람입니다.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스데반보다 더 나은 환경과 더 좋은 신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은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속에서 죽어갔고 바울은 기쁨이 아닌 분노감에 싸여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의 차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과 예수 그리스도 바깥에 있었다는 차이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바깥에 있다면 아무리 나의 환경이 좋고 조건이 좋다할지라도 그 기쁨과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참기쁨과 참 행복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그 기쁨은 이땅에서뿐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 까지 이어지는 영원하고 근본적인 참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예수 안에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누리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2.여기는 삶을 산다.

본문 7절, 8절입니다.

7.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7절 후반부에 ‘다 해로 여길뿐더러...’ 그리고 8절 전반부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8절 후반부에 ‘배설물로 여김은‘ 이렇게 여김(consider)이라는 단어가 3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보면 모두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바울에게는 과거에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일도 있었습니다. 좋은 일은 무엇입니까? 6절입니다.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열심으로는“ 남보다 더 열심을 내어서 종교생활을 했습니다. 비록 교회를 박해했지만 하나님의 위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팔일만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순수한 혈통인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베냐민 지파이었으며 종교 지도자 신분인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바울에게는 자랑스럽고 좋은 과거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쁜 일은 무엇입니까?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열심히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사건들은 그것이 좋은 일이던 나쁜일 이던 간에 ”여기면서“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여기며 살아갑니까? 좀전에 살펴본것처럼 ‘다 해로 여기고” 또한 “배설물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지도자가 되는 것 가치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부를 했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습니까? 그리고 혈통과 학벌도 가치가 있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치가 없고 유익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8절 후반부를 보시면 8.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얻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가치가 있고 중요한 것이라 할지라도 버리고 배설물처럼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바울은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얻기 전에는 학벌이나 가문이나 신분은 바울에게 중요했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난 이후부터는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보다는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과거에 가졌던 학식과 종교적인 열정은 해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아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해로운 것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입니다. 돈이나 지식이 예수님을 위해 사용되어진다면 유익하지만 예수님을 아는데 방해가 된다면 배설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머리와 이론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와 이론으로만 아는 지식을 헬라어로 ‘그노시스’ 라고 합니다. 이 “그노시스“로 인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이 번성해졌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에피 그노시스’라는 헬라어가 사용되어졌습니다. 머리와 이론으로만 아는 지식(그노시스) 가 아니라 실제 삶의 터전에서 경험하는 ”에피 그노시스“ 로 예수님을 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을 예수님보다 가치가 못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날마다 삶의 터전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믿고 살아간다면 어떤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3.달리는 삶을 산다

본문 12절입니다. 12.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달려가노라”. 바울은 무엇을 향해 힘껏 달려갑니까?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을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목적은 단지 바울의 구원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잡으신 예수님의 목적은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그 목표에는 내가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늘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의 구원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은 이루어졌지만 예수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목표에는 아직 내가 이루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향해 원하시는 목표, 그 목표를 내가 이루기 위해 나는 지금 힘껏 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향해 주님이 원하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내가 달릴 때 주님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일본 유명 작가인 와타나베 준이치가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는 책을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거에 있었던 일을 잊어버리지 못함으로 인해 그리고 거기에 너무 민감함으로 인해서 자기 인생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요. 과거의 모든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잘한 일도 잊어버리고, 못한 일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잊어버려야 한다고 해서 잊어버릴수 있게 되어집니까? 그럴수록 더욱 생각이 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니까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4절입니다. 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푯대와 우리의 목표는 더 이상 구원이 아닙니다.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앞에 서는날 우리는 상급을 받을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하여 달려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급을 받기 위하여 달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상을 위해 바울은 주님께 붙잡혀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울이 달리기까지 하면서 원했던 그 부름의 상급을 준비하시고 지켜보십니다. 이렇게 바울이 지녔던 신앙의 자세가 진정한 축복의 길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길을 저와 여러분도 갈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주님이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달리는 신앙생활을 하십시다. 그래서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께서 나를 위한 상급을 준비하며 기다리시는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