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주안에 설때 나타나는 특성

Author
kgmcc
Date
2024-04-21 01:25
Views
48
본문 : 빌립보서 4장 1-7절

날짜 : 2024년 4월 21일

<빌립보서 4장 1-7절>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두주 전에는 빌립보서 3장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상한 지식”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의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이번주와 다음주에는 빌립보서 4장을 살펴보면서 같이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 1절입니다. 1.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본문 1절을 보면 두가지 접속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맨앞에 위치한 '그러므로‘ 이고 또 다른 하나는 뒤이어 나오는 ’이와같이‘ 입니다.’그러므로’(therefore) 가 앞에 있는 내용을 연결시켜 준다면 ‘이와같이‘ 는 뒤에 나오는 내용을 연결시켜준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당시 빌립보 교회안에는 두 종류의 이단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하나는 율법주의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반도덕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입니다. 반도덕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를 오늘날 영지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저도 영지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 인간이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켜나감으로서 구원을 받을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영적에 관한 특별한 지식’ 을 알 때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우리 인간의 육적인 면에 치우쳐 있다고 한다면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적인 면에 치우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전통과 형식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예수를 아는 깨닫음(그노시스)은 중요시 했지만 이 육신의 몸으로 헌신하고 섬기는 삶은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반 도덕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삶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자들은 육신을 중하게 여겼고 영지주의자들은 영혼을 중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우리 인간의 육신과 영혼 모두 다 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성경은 우리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적인 몸까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입니다. 17.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나를 본받으라” 그러니까 바울이 한 이 말은 나처럼 위대하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들은 형식과 전통만을 중요시하는 율법주의자나 머리와 지식으로만 깨닫는 영지주의자들을 본받지 말고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주님의 뜻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음으로서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에 감사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구원받았으니 이 육신은 마음껏 하고 싶은 것 하면서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서 구원받은 성도는 ‘하늘 시민권자‘ 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입니다. 20.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는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살게 되는 하늘나라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 후반부를 다시한번 보시면 “이와같이 주안에 서라”

믿는 사람들은 주안에 서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이 구원의 자리입니다. 노아 시대때 방주안이 구원의 장소인 것처럼 오늘날에는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주안에 서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안에서 살아갈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 자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안에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까?

1.같은 마음을 품으며 생활하는 것

본문 2절입니다. 2.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가 순두게를 시기했는지 순두게가 유오디아를 시기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교회일을 하면서 이 두 여인은 서로 서로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두사람이 서로 같은 마음이 되기 위해서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 주장을 강력하게 내세워서 상대방을 내생각과 내계획에 맞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주장하고 모든 사람들을 자기 계획에 맞추게 하면서 전쟁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상대방의 뜻에 맞추어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대방이 내뜻과 내 계획에 맞추거나 내가 상대방의 뜻에 맞추면 같은 마음을 품고 행동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냥 같은 마음이 아니라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 라고 말합니다. 같은 마음이 되는 중심이 나나 너가 아니라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갈수 있는 것은 두사람 사이에 서로 협력할수 있는 어떤 공감대가 있을때에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부부라고 한다면 자녀를 중심으로 해서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사업가라 한다면 돈을 중심으로 해서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갈수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취미생활을 중심으로 해서 같은 마음을 품고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같은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빌립보 교회에서 열심을 내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봉사하고 섬기다가 보니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일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이 두사람은 여러번 다투고 비난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냥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냥 같은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두사람중 어느 한사람이 상대방의 마음을 맞추어주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주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 올수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어느 한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제가 들은적이 있습니다. 교회 야유회 행사가 있어서 음식을 비롯한 전체 행사 프로그램 때문에 모임을 가지게 되었답니다. 음식 품목을 결정하는데 어느 한 장로님이 불고기도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장로님이 다른 음식이 많이 준비되었으니까 이날 불고기 메뉴는 제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그날 모임에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번에는 불고기를 하지 말자는 쪽이었답니다, 그런데도 그 장로님은 한국사람이 피크닉을 가는데 어떻게 불고기를 준비하지 않을수 있느냐 하면서 끝까지 우겼습니다. 그래서 불고기 하나 때문에 회의 시간이 굉장히 길어지게 되었는데 저녁 6시에 시작한 회의가 밤 자정까지 끌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장로님의 주장대로 불고기를 하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그 불고기 때문에 그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중에는 마음이 상해서 나중에 교회를 떠나버린 사람이 있었다고 그 목사님이 말하더군요. 물론 극단적인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이런식으로 한사람이 강하게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이 부득불 그 사람의 뜻에 따르게 되면 후에 주님의 뜻과 다른 결과가 생길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 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안에 같은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수 있는 내용중 하나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에 있습니다. 16.항상 기뻐하라 17.쉬지 말고 기도하라 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믿는 성도들은 내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뜻에 맞지 않아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들지않고 화가 날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갈수가 있는것입니다. 이렇게 주안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같은 마음을 품고 신앙생활 해나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안에서 살아갈수 있는 것입니까?

2.서로 돕는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3.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본문 3절에는 ‘돕는다’ 라는 동사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돕고 도우라’ 이렇게 두 번이나 강조한 것은 돕는일에 적극적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경쟁하는 마음이나 시기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사람은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마지못해 협력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도움이 되는 행동는 하지않고 몸만 참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서는 그사람의 약점이나 부족한 점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이러한 모습을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으로 돕고 도우라 라고 강조한 것은 마지못해 돕는척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들은 적극적으로 돕고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요? ‘멍에를 같이 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멍에를 같이 한 네게’ 멍에를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여인들’ 복음에 함께 힘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후반부를 보시면 ‘동역자‘ 들을 도우라 말합니다. 동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멍에를 같이하고 같이 복음에 힘쓰는 동역자들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섬기는 일에 적극적인 자세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여기서 ‘멍에를 같이 한다’ 에서 멍에는 소가 밭을 갈 때 소 머리에 얹어서 수레나 쟁기를 끌게 하는 둥그렇게 구부러진 막대입니다. 그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두 마리의 소 머리에 같이 멍에를 씌워서 밭을 갈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멍에를 같이 멘 소들은 반드시 같은 방향을 가야 합니다. 멍에를 같이 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려고 하면 서로가 힘들고 괴롭습니다. 밭을 제대로 갈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두 마리 소가 멍에를 쓰고 같은 방향으로 가야 밭을 제대로 갈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믿는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를 함께 써고 복음을 위하여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멍에를 같이 써다보면 내가 원하는 길은 아니지만 같은 방향을 가기 위해서 서로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내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때도 있는 것입니다. 믿는 성도인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멍에를 같이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을 위해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를 하고 복음사역을 해나가고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다 서로 동역자들입니다. 그럼으로 서로 돕고 섬기면서 열심히 살아갈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안에 서서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하고 서로 돕고 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안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세가지 특성이 나타난다고 4절 이하에서 말씀합니다.

주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세가지 특성을 보면 그 첫째는 기쁨입니다. 둘째는 관용이고 마지막 세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나자신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면 관용하는 것은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온다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성 첫째는 기쁨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기뻐할 일이 있을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좋거나 나쁘거나 관계없이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고 말하고 있으니까 바울 자신은 물론 기뻐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알수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환경 때문에, 우리가 물질 때문에, 우리가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기뻐한다면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기도 하고 실패도 할수 있고 그리고 우리는 비난을 받을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돕고 섬기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안에 있기 때문에 환경에 관계없이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다 기뻐했습니다. 동방박사를 보십시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보면서 참 기쁜 마음으로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물가 사마리아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에 너무나 기뻐서 물동이도 내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기쁨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천국은 기쁨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기쁨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입니다. 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가 기쁨이 충만하게 살아갈수가 있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예수님이 지니신 기쁨이 우리안에 있을 때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이 지니신 기쁨을 우리가 지닐수 있습니까?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그앞에 나오는 9절입니다.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사랑안에 거하면서 살아갈 때 저와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기쁨을 충만하게 하며 살아갈수가 있습니다. 종종 우리가 죄를 짓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님 때문에 용서함을 받는 그 감격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이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라고 생각하면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늘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럼으로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멀리하고 살아가고 있라 할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안에서 신앙생활을 해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늘 기쁨의 마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특성을 보면 둘째는 관용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5절입니다. 5.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관용은 관대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줄인 말이라 할수 있습니다. 관대하게 용납하는 말은 ‘옳다, 틀린다‘ 하는 것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단어입니다. 상대방이 내게 한 행동을 보면 올바르지는 않고 이기적이지만 관대하게 용납하는 자세가 바로 관용입니다. ’잘 몰라서 그렇게 행동을 했을 꺼야‘ ’지금은 저렇게 모나게 행동해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이렇게 좀더 장기적으로 보고 좀더 넓게 바라보는 것이 바로 관용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면 올바르지 않고 이기적인데 봐주고 넘어가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뒤집어 생각해보면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책망하시거나 칭찬하실 기준은 바로 관용에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저와 여러분 관용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지 못했을 때 우리는 주님앞에서 부끄럽고 후회스런 마음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살아가는 것은 사실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관용을 하는 마음은 그 이상입니다. 우리는 다시오실 예수님을 만나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하루가 지나면 그만큼 주님을 만날날이 가까워 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날날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주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특성, 마지막 세번째로는 감사함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일에 기도와 간구로”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염려하지 말라고 한다고 해서 염려하지 않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옛날에 내가 잘못한일이 있으면 그사실이 알려지게 될까 염려가 생깁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내가 계획한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까 염려가 생깁니다. 시험을 치게 되면 시험을 잘치게 될까 염려합니다. 시험을 마치고 나면 시험을 잘쳤을까 염려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한가지 염려가 해결되면 또 다른 염려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염려를 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사라지고 은혜도 사라지고 말씀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이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달려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염려를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와 간구를 하라고 말씀합니다. 염려는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기도와 간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되 감사함으로 해야 합니다. 왜요? 믿음이 있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는 것입니다. 기도와 간구입니다. 간구는 내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할 때 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간구입니다, 건강이 약해졌을 때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간구입니다. 간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의 뜻일수도 있고 주님의 뜻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내가 돈벌고 부자 되는 것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아닐수 있습니다. 하지만 간구는 일단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할수 없는 것입니가.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에 있고 간구는 내 소원이 이루기 위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와 간구입니다. 바람직한 간구는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본문 7절입니다.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무엇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평강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강은 일시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안함을 맛보기 위해서 마약도 하고 술도 마십니다. 하지만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평안함을 맛보기 위해 계속 반복해서 마약과 술을 하다가 중독자가 되어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영원한 평강입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평강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켜 주신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탄 마귀로부터 방어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같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죄로 유혹하고 그래서 넘어지게 되면 죄의식으로 공격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게 되면 세상이 주는 유혹에서 이겨낼수 있습니다. 마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난후에 가지는 평안함 보다는 하나님의 평강이 더욱 강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을 때 사람들과의 관계도 평화롭게 됩니다. 마음에 관용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기도와 간구하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가지고 남은 평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