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믿음으로 아벨은

Author
kgmcc
Date
2024-06-16 02:46
Views
53
본문 : 히브리서 11장 4절

날짜 : 2024년 6월 16일

<히브리서 114>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시는 성도님들도 계시겠지만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 불립니다. 수많은 믿음의 선배님들이 살아온 신앙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믿음장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시면 믿음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 실상이요... 증거이다“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입니다. 이해가 될 듯 말 듯 할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설명을 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자, 노아에게 있어서 믿음의 실상은 무엇으로 나타났습니까? 좀더 쉽게 질문을 하자면 노아가 믿음이 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방주로 나타났습니다. 만질수도 있고 볼수도 있는 실상인 방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아에게 있어서 믿음이 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방주인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방주는 눈에 보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방주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노아에게 너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하면 노아를 보여주면 됩니다. 자, 실상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휘포스타시스‘인데 ’권리 증서’ 와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등기부 등본이나 땅문서와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땅문서만 있으면 그 땅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의 것이다 라고 주장할수 있는 것입니다. 내 땅이다라고 하는 증거가 바로 땅 문서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땅에 누가 농사를 짓고 살든지 아니면 집을 짓고 살든지 상관이 없이 땅문서만 있으면 내가 그땅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집이나 농사가 실상이 아니라 땅문서가 실상인 것입니다. 자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많은 실수를 하고 부족함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왜요? 믿음이 있으니까요. 그러니가 이 반대의 논리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내가 구원을 받아 천국에서 살아갈수 있을까?라는 염려와 불안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으로 천국에 갈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러한 염려와 불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이 개념을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이렇게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난 이후에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믿음의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벨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저와 여러분이 아벨이 가진 믿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의 죄를 범하고 난 이후에 태어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알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지니고 육적인 오감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알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는 것 이것을 다섯가지 감각이라고 하죠. 우리 인간이 지닌 이 다섯가지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볼수도 없고 경험할수도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육이 아니라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에 우리 인간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과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우리 인간은 아주 자연스럽게 더많은 죄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운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구했던 최초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아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벨을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을 찾았던 최초의 신앙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아벨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벨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아벨에 대한 언급은 창세기에 조금, 복음서에 한 번, 그리고 이 히브리서에 2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창세기를 보시면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는지에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 많은 성경학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크게 4가지 설명을 합니다.

그 첫 번째 해석은 피와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입니다. “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모든 물건은 피로서 정결하게 되는데 아벨은 양을 잡았기 때문에 피흘림이 있었지만,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에 피 흘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피 제사” 는 레위기에 가야 비로소 정립이 제사법 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피의 제사는 시기적으로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법을 가르쳐 주시지도 않은 상태에서 ‘가인은 너는 나쁘고, 아벨 너는 옳다’ 라고 심판하시는 것은 공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서 이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법을 창세기에 적용한다고 해도 이러한 해석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기의 제사법에는 피 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곡식제사도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빻아서 드리는 제사는 소제라고 합니다. 이 소제도 있습니다. 반드시 피를 흘리는 제사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피흘림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충분하지는 못합니다. 물론 가능성은 있겠지만 충분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1. 두 번째는 제물의 가치와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아벨은 정성을 다하고 구별을 해서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은 아무것이나 막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 라고 주장합니다. 전해오는 기독교 야사에 의하면 아벨은 양치기로 나오고 가인은 대장장 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벨은 자기가 기르는 양 가운데서 가장 살찌고 좋은 양을 택해서 제물로 바쳤지만, 대장장이었던 가인은 자기 눈에 보이는 보리 한자루를 가져다가 제단에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성경이 아닌 전해오는 기독교 야사를 배경으로 한 내용입니다. 성경 그 어느 곳을 보아도 아벨은 정성을 다해 가장 좋은 것을 바쳤고, 가인은 대충 아무것이나 바쳤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도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해주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1. 세 번째로는 초태생과 관련해서 설명합니다.

아벨은 자기가 기르는 양의 첫 번째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가인은 첫 열매가 아닌 그저 자기가 지은 농산물중 일부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다 라고 설명합니다. 처음으로 태어난 것 즉 초태생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초태생을 드린 아벨의 것은 받고, 그렇지 않은 가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태어난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은 유월절 사건 이후에 나온 것입니다. 유월절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애굽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생물은 짐승이던 사람이던 모두 죽이셨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어린양의 피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장자들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첫번째 태생, 첫 소산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기적으로 볼 때 뒤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초태생에 관련된 설명은 합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네 번째 해석

제물만의 문제가 아닌 제사를 드리는 자의 심령의 문제 이라고 설명합니다.

창세기 4장 4-5절입니다.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아벨의 제물과 가인의 제물이 아니라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제물도 중요하지만,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더 중요하다 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순서도 중요합니다. 제물과 아벨이 아니고 제물과 가인도 아닙니다. 아벨과 그의 제물, 가인과 그의 제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것은 단지 제물의 문제만이 아니라 드리는 사람도 문제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벨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가인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명확하게 대답해주지 않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맞아 죽은 것으로만 나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아벨에 비해서 가인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좀더 쉽게 추측할수 있습니다. 아벨이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이 왜 받으셨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가인과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성경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4장 6-7절입니다.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성경은 가인의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금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가 거절당한 이유로 인해 분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거절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이전에 가인의 마음엔 이미 분이 가득 차 있었는데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거절했다는 것이 도화선이 되었고 그 분노가 밖으로 표출되었던 것 뿐입니다. 즉, 가인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불만과 분노와 그리고 미움과 시기심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것은 가인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로 인한 것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상처가 없는 사람, 마음에 불만과 분노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음에 시기심과 미움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모두가 다 저마다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불만과 분노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에 불만과 분노가 있고 미움이나 시기심이 있어도 이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내어 놓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치유해주시길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기뻐 받으십니다. 시편 51편 17절입니다. ‘17.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은 마음에 상처가 있어 속상해하고 불만이 있는 그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불만이 있고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앞에 죄가 될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탓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게 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심판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가인도 마찬가지 입니다. 불만과 분노, 그리고 미움과 시기심이 어떤 사람에게는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살려주시는 은혜가 될 수가 있지만 이 가인에게는 심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르지 못한 심령의 제사가 이 가인에게는 문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불만과 분노를 할수 있습니다. 마음에 시기심과 미움이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상한 심령으로 예배드릴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는 상한 심령이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보십시다. 보석가게를 털면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통회를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바친다고 해서 그 죄가 용서되어지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을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죄로 인해 상한 심령이 되고 어떤 사람은 죄로 인해 불만과 분노의 마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 “너는 죄를 다스리라” 죄를 물리치고 극복할 수가 없다면 상한 심령이라도 되어 하나님앞에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죄를 다스릴수 없습니다. 늘 죄에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제 마음에 분함과 불평과 미움과 시기심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러한 제 마음에 찾아와 주시고 저를 회복시켜주시옵소서. 이렇게 하나님앞에 심령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처럼 아벨도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상한 마음과 상처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오늘 본문에서 아벨의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4절 다시한번 보시겠습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 “믿음으로” 이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지금까지 저희들이 생각해보았던 내용들을 모두 연결시켜서 재해석을 해보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때의 그 마음자세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는데 이것이 바로 아벨이 가진 믿음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믿음이란 자신에게 불만과 분노 그리고 미움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릴때 이 상한 심령들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 라고 하는 마음자세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하나님앞에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내 마음이 어떠한 상태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나의 이 어둡고 상한 마음을 받아주시고 회복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저와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아벨과 같은 믿음이 있을때 우리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신앙 생활할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1.하나님이 받아 주신다

본문 4절 전반부입니다.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는 하나님에게 열납이 됩니다. 저와 여러분,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행복하던 불행하던 평안하든 불안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내모습 이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보시고 나의 탄식을 들으시고 만져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제사가 바로 아벨이 드린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사람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다음을 보시면 믿는 성도가 구체적으로 가져야 할 믿음의 내용에 대해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하나님이 지금 내앞에 계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때는 이러한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벨이 가졌던 믿음입니다. 아벨에게는 매사에 불만과 분노로 살아가는 형 가인이 있었습니다. 자기 부모인 아담과 하와에 대한 불만일수도 있습니다. 자기 동생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대한 시기심일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형과 같이 살아가는 아벨에게 어떻게 평강의 마음만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이 자기 앞에 계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벨에게 하나님은 상을 주신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기 전에는 미움과 분노이었지만 제사를 드린 후에는 기쁨과 평강이었습니다.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고 불안 염려가 변해 평강이 되는 상급을 받으며 살아온 아벨이었습니다. 아벨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이러한 아벨이 가진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나아가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받으시는 복된 심령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신앙생활할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2.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된다.

4절 전반부 보시겠습니다.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이 아벨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입니다.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해서 아벨이 의인이 된 것입니까? 오늘 본문은 “믿음으로” 라고만 말씀합니다. 이 아벨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수있는 내용이 두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는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가인의 돌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가지 내용 가운데 아벨이 예수님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그가 가인에게 죽었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죠. 아벨이 드린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벨이 믿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때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인이 됩니다. 로마서 4장 3절입니다. 3.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이 의인이 된 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과 우리는 다르지 않습니까? 라고 의문을 가지는 분도 있을수 있을 것 같아 성경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입니다. 1.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믿음으로 (그다음에 무엇입니까?)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운 자가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내 아픔과 내 미움을 아시는 하나님, 나의 불만과 나의 분노함까지도 아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이 받으시고 인정하시는 의인이 되어 우리는 살아갈수 있습니다.

아벨이 살아생전에 어떤 선한 일을 했는지,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겼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아서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믿음이 있었기에 의인으로 인정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모든 일에 믿음으로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의인으로 인정 받을수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벨과 같은 믿음으로 신앙생활할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3.하나님께서 내 삶을 증거하신다.

본문4절 후반부입니다. 4.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누가 말을 합니까? 아벨은 죽었는데 어떻게 말을 합니까? 그 믿음이 말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믿음을 하나님이 증거하신 것입니다. 앞을 보시면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하나님이 아벨이 살아왔던 인생을 증거하십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자기를 증거 하면서 살아갑니다. 특별히 법정에서 소송이 있을때는 서로 자기 증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은 피곤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우리 믿는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이 증거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아벨이 죽었지만 믿음으로 지금도 말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벨이 형 가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은 억울하게 죽었고 그의 마지막은 비참하게 끝이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심해야합니다. 어떻게 죽었느냐가 그 인생을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구별없이 이세사을 살아가는 동안 교통사고로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총에 맞아 죽을수 있습니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평안하게 죽었느냐 아니면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해 갑자기 죽었느냐 가 그 인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평가는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냐 증거하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아벨은 비참하게 살인을 당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 되는 형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처럼 비참하게 죽은 인생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아벨의 삶을 증거해주십니다. 비참하게 죽었지만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은 이 아벨의 믿음을 우리에게 증거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증거해주시는 이 아벨의 믿음은 얼마나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 우리가 아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스스로 나의 삶을 증거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증거 해주십니다. 우리가 설사 객지에서 비참하게 죽게 된다 할지라도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나의 믿음을 증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아벨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이세상을 떠난뒤에도 하나님이 증거해주시는 은혜를 누릴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