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그 된 일을 보고

Author
kgmcc
Date
2020-05-02 23:22
Views
103
본문 : 누가복음 22장 49-51절

날짜 : 2020년 5월 3일

 

<누가복음 2249-51>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 종교가 정해놓은 그 율법을 사람이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에 따라 구원을 받거나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 종교가 가르치는 율법을 끝까지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걱정은 내가 정말 구원을 받을 수 있을만큼 율법을 잘 지켜왔는가 하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잘 지키고 살아갈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지만,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살아갈때는, 내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불안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세상의 이런 종교와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먼저 구원을 받고 신앙생활 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행과 구제를 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율법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떤 희생과 손해가 있어도 감사하면서 감당해나갈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식이 되기 위해서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내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내 눈에 보이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닮아갈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청하는 제자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길이 됩니다.

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들에게 붙잡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이 장면에서 우리는 제자과 예수님 사이에 서로 대조되어 행동하는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본문 49절 전반부입니다. ’49.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기서 ’그 된일을 보고...‘ 라는 표현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을려고 검과 몽치를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의 눈으로 볼때는 그냥 가만히 있을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이런 경우처럼 내가 반드시 반응을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길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표현처럼 ’그 된일을 보고‘ 그냥 있을수 없을때가 있습니다. 내 자녀가 학교에서 반 친구들로부터 욕설을 당하고 빰을 맞은 일이 일어난다면 부모로서 어찌 가만히 있을수 있겠습니까? 내 아내나 내 남편이 사람들로부터 빈정거림을 받고 있다면 어찌 가만히 있을수 있겠습니까? 내 부모님이 주변사람들에게 '늙은이' 라고 말하면서 함부로 대한다면 자식으로서 가만히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그 된일을 보고‘ 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 된일을 보고‘ 제자들은 가만히 있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제 나름대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자들이 하는 반응에 대해 당연하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본문의 장면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은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위급한 일이 일어날 때 예수님처럼 행동 할수만 있다면 우리는 인생과 신앙생활에서 정말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본문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닮은 인생을 살아갈수 있으시길 소망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1. 모든 인간을 사랑하심

예수님의 삶을 보게되면 언제 어디서나 모든 종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모습을 알게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그런 모습을 봅니다. 본문 50절입니다. ’50.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여기 본문에서는 칼을 휘두른 사람과 그 칼에 맞아 귀가 떨어진 사람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8장 10절을 보시면 그 사람들의 이름을 알수 있습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 이름은 말고라‘ 그러니까 칼을 휘두른 사람은 베드로 이고 그 칼에 맞아 오른쪽 귀가 떨어진 사람의 이름은 ’말고‘ 인 것을 알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말고를 향하여 칼을 휘둘렀고 말고의 귀를 짤랐습니까? 아마 그 이유는 말고가 예수님을 붙잡을려고 했던 무리들 중에서 맨 앞에 섰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해봅니다. 말고는 자기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붙잡겠다고 제일 앞장섰던 것입니다. 속된말로 이 말고는 제일 먼저 칼 맞을 짓을 한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이 말고를 향해 칼을 휘둘렸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말고는 자신의 귀만 짤렸습니다. 만약에 저와 여러분이 영화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면 말고가 베드로의 칼에 가슴이 찔려 피를 흘리면서 죽기를 바랬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말고는 예수님을 붙잡으려온 나쁜 사람이지 않습니까?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 악당이 총이나 칼에 맞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어갈 때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의 속이 시원한 것입니다. ’잘 죽었다!‘ 이런 반응이 자연스런 우리인간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원래 악당은 잘 안죽죠. 아주 나쁜 악당은 총이나 칼을 맞아도 잘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히려 선한 사람을 괴롭히는 장면이 더많이 나옵니다. 어쨌든 우리는 만일 영화를 보고 있다면 귀가 짤린 말고의 모습을 보면서 ’저 친구가 칼을 맞아 죽어야만 했는데 귀만 짤려 아쉽네‘ 라는 생각까지 할수도 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51절 후반부입니다. ’51.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붙잡기 위해 가장 앞장서서 설쳐대고 있는 그 인간을 고쳐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이정도면 못말리는 사랑의 크기입니다. 이렇게 그 누구도 못말리는 사랑이 성경에선 진정한 사랑인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진정한 사랑은 조건이나 결과를 따지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베푸는 사랑으로 인해서 잘되겠다, 못되겠다를 따지지 않고 베푸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오래전 홍성사 출판사에서 발행된 ’이들을 보소서‘ 라는 책에 나오는 실제 일어난 사건의 한 장면을 일부분 소개합니다.

’1975년 여름에 교도소안의 좁은 복도에 수갑을 찬 죄수와 몇 명의 교도관이 걸어가고 있다. ‘어머니의 면회’라는 소리에 따라나선 사형수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스물 한 살의 홍안이다. 잔디밭이 있는 갈림길에 이르자, 교도관은 사형수의 팔을 나꿔채며 왼쪽 길로 몰아붙였다. 길 끝 집행장의 회색 쪽문이 열려 있었다. “아니, 지금 집행하는 겁니까? 그럼 어무이는 예...”

어린 사형수는 애원하듯 물었다. 그러나 상황을 알아차린 사형수는 이내 모든 걸 체념하고 높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진창을 피해 총총히 집행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랏줄로 팔과 허리를 사정없이 묶인 사형수는 집행관 앞에 꿇어앉았다. “마지막 할 말은 없는가?” 의례적으로 집행관이 물었다. 어린 사형수는 두 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우리 어무이 좀 보게 해주이소.” 형식적인 문답이 오고간 뒤 사형수는 이내 교수대에 목이 매달렸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이 어린 사형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를 보고싶어 했던 것은 자신의 어머니는 자신이 살인을 했고 그래서 사형수가 되었지만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조건이 없는 사랑을 베푸는 존재는 '어머니' 입니다. 하지만 그 어머니 조차도 고개를 돌리고 잊을려고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9장 15절입니다. '15.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하나님의 손바닥에는 저와 여러분의 이름이 새겨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나를 잊어버릴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대개의 경우 죽을 짓을 하고 다니는 말고 같은 인간을 보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저런 정신없이 설쳐대는 인간은 귀가 짤려서 혼이 나봐야 돼 그래야 정신 차리지, 저런 인간은 혼나지 않으면 다음에 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아예 혼내서 정신 차리게 해야 돼. 그래도 정신 못차리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해야 돼’ 라고 생각할때가 많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할때가 믾습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종종 꿈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에게 주먹을 휘두를때가 있습니다. 참고 참다가 더 이상 도저히 참지 못하고 폭발하면서 상대방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맞는게 아니라 제곁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아내가 맞고 소리지르는 바람에 제가 깨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아내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아침이 되면 아내가 제게 이렇게 말해요. ‘아니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목사가 참아야지. 목사가 되어서 주먹은 왜 휘두르세요?’ 듣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지만 꿈속에서는 끝까지 참는 것이 잘 안되는것을 어떻게 합니까? 꿈속에서 못되게 구는 사람은 정말 사탄처럼 약을 올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꿈속에도 자꾸 약 올리는 그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지나친다면 저는 정말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될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쨌튼 예수님이 베푸시는 사랑은 아무 조건이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말고의 귀를 고쳐준다고 해서 예수님 자신에게 덕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죠.

유명한 신학자 C.S 루이스가 이런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성경책을 가마솥에 넣고 팔팔 끊이면 사랑이라는 한 단어만 남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아들을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기독교를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바치기까지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는 성도는 아들을 이땅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내놓고 죽으시기까지 하신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랑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입니다. 1.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니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말씀 이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씻기시는 그 발들이 가는 곳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어떤 발은 자신을 은 30 에 파는 배신자의 발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발들도 붙잡힌 자신을 버리고 도망쳐버릴 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지을죄를 이미 다 용서하시고 그발들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족식을 하시고 난이후에 예수님은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입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여노라’ 사실 아무 조건이나 결과도 없는데 무작정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지만 그럴 때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미 지은 죄뿐 아니라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다 아시면서도 용서해주신 분이십니다.

생각해보십시요. 그날밤 제자들이 살기위해 정신없이 도망치고 난후 그나마 안정된 장소에서 고개를 숙이며 가쁜 숨을 쉬고 있을 때 문득 자신들의 눈에 발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 발은 몇시간전에 예수님이 정성껏 씻겨주신 자신들의 발이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은 그 발을 가지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린 일을 떠올리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요. 내가 사랑하고 용서하기 힘들 때 예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사랑을 생각하십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우리는 점점 예수님을 닮아갈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될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사랑할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조건이나 결과를 따지지 않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닮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

2. 작은 일에도 충성하심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예수님께서는 며칠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건은 우리 인류에게 너무나 크고 중대한 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붙잡혀서 이제 막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 순간들입니까? 이 순간은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보내시고 예언 하셨던 장면입니다. 아니, 아담이 범죄 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 계획하셨던 일이 실현되고 있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작고 하찮게 보이는 말고의 귀를 고쳐주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온 세상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지금 걸어가시고 계신 모습과 칼 맞을 짓을 하다가 귀에 칼을 맞고 땅에 떨어진 그 말고의 귀를 줍으시는 모습은 그 크기나 중요성에 비교한다면 어떻게 서로 비교 할수 있겠습니까?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 한조각을 줍지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냥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을 갈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대로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고 해서 그 누구도 예수님을 사랑이 없으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고쳐주신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붙잡혀가는 그순간이 너무나 크고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 같지도 않은 괘씸한 짓을 하다가 칼맞고 땅에 떨어진 그 인간의 귀 한조각을 줍는 일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말고는 한쪽귀가 없어도 다른 쪽 귀로 듣고 얼마든지 살아갈수 있습니다. 듣기에 좀 불편할 뿐이지 살아가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십자가의 길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급하고 다급한 순간에 피하시거나 방어하시지 않고, 땅에 떨어진 말고의 귀 한조각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아주 작고 하찮은 일에도 정성을 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작고 하찮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에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크고 중요한 일을 해버리면 작고 하찮은 일은 하지않아도 다 용서가 됩니다. 지금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붙잡히시고 그냥 십자가의 길을 가셔도 우리는 아멘 하면서 감사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누가 복음 16장 10절입니다.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우리는 작은일, 큰 일, 중요한 일, 사소한 들로 구분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두가 다 최선을 다해야할 일로 보십니다. 사실 무엇이 작고 무엇이 크고 중요한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말고의 입장이라고 한다면 그일이 어찌 작고 하찮은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내가 맞을짓을 했고 그래서 말고와 같은 일을 당했다 할지라도 내 귀가 짤렸는데 어찌 그것이 작고 하찮은 일 일수 있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주님 눈에는 작은 일도 큰일도 없이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에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에게는 대충대충 해야 할 일도 없고 충성해야 할 일만이 있습니다. 가정주부가 집안에서 하는 일은 표시도 나지 않고 하찮고 작은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가정주부가 그 하찮고 표시도 나지 않는 일을 하루 이틀 사흘 하지 않으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작고 하찮게 보이는 일에 충성할 때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작고 하찮은 일에도 충성하심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생활을 할수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본문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

3. 끝까지 인내하심

51절 전반부입니다. ‘51.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이것까지 참으라...‘ 말고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죠.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반드시 이런 순간이 올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참고 참았는데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베드로의 눈에는 말고의 행동이 제일 눈에 거슬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말고에게 칼을 휘둘렸던것입니다. 하지만 진작 흥분해야 할 분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말고의 목적은 예수님을 붙잡는것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을 향하여 ‘이것까지 참으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라는 생각이 들때 이 예수님의 참으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더 이상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때가 바로 예수님을 닮을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등산을 해보신 성도님들께서는 다 경험하셨겠지만 산정산에 올라가야 산 반대편에 무엇이 있는지 전체를 볼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정상에 올라가야 하나님의 준비해놓으신 ‘여호와 이레의 복’ 을 경험할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십시오. 그들이 모리아산 정상에 올라갔을때에야 비로소 ‘여호와 이레’ 의 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시내산 정산에 올라가셔야 비로소 하나님이 예비해놓으신 계획을 알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상급은 '구원' 이라고 이야기하는 분들을 종종 볼수 있습니다. '구원이 상급이지 그 외에 무슨 상급을 바라느냐'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숙한 성도가 가진 참 믿음은 '상을 바라는 믿음' 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입니다. '6.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은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 7절 이하를 보시면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지닌 믿음의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준비해놓으신 상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면서 믿음의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도저히 참을수 없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것까지도 참으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인내할수 있는 본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주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9, 10절입니다.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꺼져가는 촛불 같은 작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의 남은 인생은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다 지나갈 것입니다. ‘더 이상은 못참아!’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래요 우리가 돈을 많이 벌고 좋은 환경에 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인생에 성공한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 닮아가는 생활을 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남은 생애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