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사흘동안

Author
kgmcc
Date
2020-05-23 22:57
Views
647
본문 : 사도행전 9장 1-9절

날짜 : 2020년 5월 24일

<행 9장 1-9>

1.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바울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가장 위대한 목회자요 가장 위대한 선교사라 할수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바울이 쓴 서신이 13권이나 됩니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생명의 복음이 유대땅을 넘어서 이방지역에 본격적으로 전파될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신학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었더라면 교회는 없었을 것이고 바울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기독교는 존재할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바울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하실수 있으시지만 그만큼 바울이 끼친 영향이 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 바울을 통해서 한사람이 하나님께 붙들린바 되었을 때 얼마나 위대하게 쓰임을 받을수 있는가를 볼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거나 인류 역사를 보게 되면 우리 하나님은 준비되지 않고 헌신되지 않은 많은 사람보다는 준비되고 헌신된 한 사람을 들어 사용함으로서 크고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베들레헴 목동의 소년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2미터 90센티나 되는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주었습니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부모 없이 자랐지만 멸망직전에 있던 유대 민족을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무디를 보십시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구두닦이 소년이었지만 19세기 후반 미국의 부흥 운동을 이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해서 복음이 소아시아로 그리고 로마와 유럽으로 해서 미국과 아시아로 그 복음이 전세계로 확장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그리고 선교사이었던 바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가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회심하게 된 과정을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본문 1절입니다.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바울이기 전에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가고 있는데 그 대제사장에게 가고 있는 사울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습니다. '살기' 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남을 해치거나 죽일려는 무시무시한 기운’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런데 위협과 살기라는 단어 앞에 '여전히'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그러니까 지금 한순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계속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사람의 눈을 보게 되면 그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눈에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는 것은 그 사울의 마음에 미움과 증오심으로 가득차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 직접 다메섹을 찾아갈 정도로 증오심과 살기가 등등했던 것입니다. 2절입니다.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그당시 다메섹에는 유대인들이 3만에서 4만 정도가 살고 있었고 회당도 30여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핍박으로 인하여 저 멀리 외국의 나라인 다메섹으로 까지 피신한 믿음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거리는 약 280킬로미터(175마일) 입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대전까지 조금 못 미치는 거리라 할수 있는데 걸어서 간다면 약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멀리에 도망간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게 되면 사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수있습니다. 그러면 사울은 왜 이렇게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했습니까? 그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만을 믿는 유대교 신자인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도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은 자기 목숨보다도 귀한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요2장 19). 그러니까 사울의 눈에는 예수가 성전도 모독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눈에 예수는 완전한 이단이요, 그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교집단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울은 하루빨리 이땅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청소해버리고 기독교를 없애버리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잘못된 종교적 열심과 편견이 사울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으로 열심은 좋지만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를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을 보시게 되면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볼수 있습니다. 이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열심과 충성에 있습니다. 열심과 충성도 만큼은 우리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몇 개월전에 우리나라 대구 지역에서 가장 많이 우한 코로나 확진자 수가 증가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 잘아시겠지만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 종교단체 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우한 코로나 확진자 수가 증가되고 있는 중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계속 모임을 가졌습니다. 정부에서 종교 모임을 갖지 못하게 제제를 하자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비밀 모임을 지속해오는 바람에 전국에서 대구가 가장 많이 확진자수가 생겼던 것입니다. 이게 다 잘못된 열심과 충성 때문입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열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잘못된 열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은 인생의 독이 되고 마음을 강퍅하게 만듭니다. 잘못된 충성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열심과 충성은 위험합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열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진리 안에 거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열심이 무엇을 위한 열심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전에 사울은 잘못된 열심을 가지고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사울의 회심과정

본문의 바울은 대제사장으로부터 받은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 공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그 사람을 끌고 예루살렘으로 올수 있다는 것을 허락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공문을 가지고 사울은 살기가 등등 한 채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1. 하늘의 빛이 임함.

3절입니다. 3.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하늘로부터 빛이 비칠때가 언제입니까? 사도행전 26장을 보시면 '정오의 때' 라고 설명합니다. 팔레스틴 지역의 정오는 너무나 뜨겁고 너무나 무덥습니다. 그래서 정오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하던일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합니다. 그렇게 뜨겁고 무더운 시간에 사울이 다메섹 도상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의 열심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알수 있습니다. 사울의 뜨거운 열심은 다메섹의 뜨거운 한낮의 열기보다도 더 뜨거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뜨거운 정오의 햇빛과 사울의 뜨거운 열심보다도 더 밝고 더 강렬한 빛이 사울의 눈을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초자연적인 강렬한 빛이기 때문에 사울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그렇게 과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땅에 엎드려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날 하늘로부터 사울에게 임한 빛은 어떤 빛입니까? 그빛은 바로 생명의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입니다. ‘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생명의 빛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이 예수님의 생명이 되는 복음의 빛이 각 사람의 마음에 비추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 후서 4장 4절입니다.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니까 이 사울에게 빛이 임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그 현장에 임재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울의 회심 과정

2. 예수님의 음성을 듣음.

사울이 강력한 빛에 의해서 땅에 엎드려졌을 때 하늘로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첫 번째 음성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그래서 너무 놀란 사울이 ‘주여 누구시니이까?’ 라고 묻습니다. 너무 놀래서 자기 입으로 예수님을 보면서 ‘주여’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자 두 번째 음성이 들립니다. 5절 후반부입니다. ‘5.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본적이 없습니다. 만나본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박해한적도 없습니다. 다만 사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믿는 성도를 박해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신비한 연합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경은 교회를 표현할때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와 몸은 연합이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내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내속에 거주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주님과 나는 연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세상에 나홀로 있다 할지라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이 된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누군가가 나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나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사기를 쳤다면 그것은 바로 주님에게 사기를 친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이러한 예수님의 음성을 사울은 들었는데 사울과 동행했던 일행들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7절입니다.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그 현장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음성을 들은 사람은 사울 한사람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회심하는 사건은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이라는 것입니다. 회심은 각각 개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각각 개별적으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때가 있습니다. 왜 내게는 바울과 같은 특별한 체험이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회심의 과정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베드로의 회심 과정이 다르고, 니고데모의 회심이 다르고, 바울의 회심과정이 다릅니다. 바울과 같이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 회심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 디모데처럼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별 특별한 체험이 없이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회심하게 되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를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다 동일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게 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결과는 동일합니다. 햇빛보다 더 강한 빛에 의해서 눈먼 맹인이 된 사울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지역에 도착하게 됩니다.

사울이 겪은 사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그리고 다메섹 지역에서 사울은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한채로 지냈습니다. 9절입니다. ’9.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사흘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캄캄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이 사흘동안에 사울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사람이 회심하게 될때 일어나는 사건은 바로 회개이죠. 사흘동안에 사울은 주님앞에 회개를 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예수님 저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였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신은 구약에서 말씀을 해오고 있었던 그 메시야이었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회개하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주님앞에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결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이라고 항상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 사흘동안 자기 자신이 그동안 움켜쥐고 있었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있어서 이 사흘은 자신이 그동안 움켜쥐고 있었던 것을 다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의 그 좋은 학문과 가문과 신분과 명예를 다 내려놓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사흘은 자아가 깨어지고 죽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그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용하심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사울과 같은 사흘이 있었던 것을 알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하루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독자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갔던 그 길은 사흘길이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걸어갔던 그 사흘동안 가졌던 아브라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하나님 다른 방법은 없나요? 꼭 이 아들을 드려야만 합니까?‘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겠습니까? 그럴때마다 흔들리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시 굳게 잡고 이삭을 붙잡아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고 믿음의 조상으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의 인생길에도 이 사흘이 있었습니다. 니느웨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요나가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의 잘못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가 뽑혔습니다. 그래서 요나가 바다밑으로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다속에 큰 물고기를 준비하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이후로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간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물고기 뱃속이 어떤 곳입니까? 들어간 본 사람이 없어서 모두들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빛이 없기 때문에 칠흑같이 어두웠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이 경험했던 칠흑같은 어두움과 같습니다. 무덤속에 내려가셨던 예수님의 사흘과 같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스올의 뱃속이라고 고백합니다. 스올은 음부를 의미하는데 지옥에 있는 것 만큼 캄캄하고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그 사흘동안 요나는 부르짖어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 감사를 하고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후에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내고 이후에 요나는 잃어버린 사명을 되찾아 니느웨로 가게 됩니다. 지금도 니느웨에는 요나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무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그 이후 끝까지 사명 감당하며 살았던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울이 경험했던 이런 인생의 사흘을 허용 하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생의 사흘길은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인생길의 사흘을 보내는동안 우리는 나는 실패한 인간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무기력한 존재로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실패한 인생으로 보았습니다. 조롱을 당하고 뺨을 맞고 침뱉음을 당해도 그냥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 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길에서 이러한 사흘을 보내는 동안 세상사람들의 눈에 나를 실패한 사람처럼 볼수 있습니다. 무기력한 사람으로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간에도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의 이 인생길의 사흘 동안에 내가 죽어지고, 내가 깨어지고, 내가 내려놓을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죽은지 사흘만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영광의 부활을 하신 예수님처럼 어두운 사흘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드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호세아 6장 2절입니다. ’2.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거꾸러 짐을 당하는 날이 있어도 이틀후에 우리를 살리시고, 셋째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요 인생의 그 사흘은 내 욕심과 내 자존심이 죽어지는 시간이고 깨어지는 시간이고 내려놓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주 긴 세월처럼 느껴 질수가 있습니다. 나의 모난 부분이 깍아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나에겐 너무나 고통 스러울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일어서게 될 것입니다.

사울은 사흘이 지나자 눈에 비늘같은 것이 벗겨지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명을 가지고 사명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흘이 지나면 우리에게도 정욕의 비늘 탐욕과 욕심의 비늘이 벗겨지고, 새롭게 보여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명을 가지고 사명자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어둠의 사흘이 얼마나 길게 지속 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흘동안 내가 얼마나 잘 내려놓고 내 자아가 얼마나 잘 깨어지고 내 주장과 고집이 얼마나 잘 죽어질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지금 우한 코로나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믿는 성도들인 저와 여러분은 이 어려움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어둠의 사흘’이라 믿으십시다. 이 어둠의 사흘이 지나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저와 여러분을 통해 이루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길에 사울과 같은 사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크신 일을 이루어 내시기 위해서 이 사흘의 인생길을 허용하셨다‘ 고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일을 이룰만 하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일을 맡기시기 전에 먼저 어둠의 사흘길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저와 여러분이 인생길을 가는 동안 이런 사흘 인생길을 걸어가게 될 때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나의 생각과 나의 가치관을 온전히 내려놓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바라옵기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소명을 가지고 사명자로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어 나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