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가라지, 쭉정이, 알곡(2)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Author
kgmcc
Date
2020-08-22 21:39
Views
36
본문 : 마태복음 3장 5-12절

날짜 : 2020년 8월 23일



 

<마태복음 35-12>

5.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지난주에는 샬롯 열방 선교 교회와 헤모 선교회를 섬기시는 강준원 목사님께서 저희 교회에 오셔서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에 지난주에 나눌려고 했던 내용을 이번주에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는 ‘추수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는 제목으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가 주는 교훈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 곡식과 가라지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정도 자란후에는 서로 구별이 가능하지만, 가라지가 곡식보다 더 깊이 뿌리를 박고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으면 곡식들이 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밭주인은 추수때까지 그냥 놔두게 합니다. 이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밭주인을 미워하는 원수가 밤중에 몰래 밭에 와서 덧뿌렸기 때문에 가라지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가라지를 밭에 뿌린 원수는 마귀라고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십니다. 그러니까 이 가라지와 곡식은 그 근본 태생부터 다릅니다. 가라지는 마귀가 뿌린것이고 곡식은 예수님이 뿌리신 것입니다. 그럼으로 가라지가 곡식이 될수없고 곡식이 가라지가 될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본질적으로 곡식이기 때문에 중간에 가라지가 될수는 없습니다. 물론 부분적으로나, 신앙적인 차원에서 내자신을 되돌아볼때 '혹시 나는 가라지는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가라지와 곡식은 근본이 다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가라지를 곡식으로 그리고 곡식을 가라지로 변화시킬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권한에 속해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할 부분은 내가 곡식이어야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우리는 ’가라지는 가라지이고 곡식은 곡식이다‘ 라는 이러한 기본적인 진리를 먼저 명백히 하고 신앙생활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요즈음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사회가 이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주변의 이단들이 외치는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생활 해나갈수 있습니다. 가라지인 악한자의 아들들이 하는 주된 일은 ’모두를 넘어지게 하고 또 불법을 행하는 것에 있다‘ 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즘에 들어와서 이단들은 세상끝이 왔다고 주장하면서 두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자기들이 믿는 종교만이 참 진리이고 구원이 있다고 유혹합니다. 물론 세상끝이 가까이 왔다는 징조와 현상들을 오늘날 쉽게 찾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온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럴때일수록 우리는 믿는 성도로서 성실하게 생활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면 주님오시는 그날은 심판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자, 오늘은 가라지가 아니라 쭉정이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가라지(Weeds) 는 곡식이 아니지만 쭉정이(Chaff)는 알곡과 같은 곡식입니다. 밭주인이 밭에 같은 씨앗을 뿌렸는데 추수때가 되자 어떤 씨앗은 알곡이 되었고 어떤 씨앗은 쭉정이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가라지와 곡식은 외형상으로 구분이 가능하지만, 쭉정이와 알곡은 외형상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는 방법은 겉모양의 차이가 아니라 내면적인 차이에서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스크린 그림참조).

그리고 가라지는 추수할때 그 추수하는 밭에서 곡식과 분리 됩니다. 농부가 곡식을 거둘때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뒤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밭에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 불속에 태웁니다. 이렇게 1차적으로 가라지와 곡식을 분리된 곡식들은 단으로 묶여서 타작마당에 모아놓습니다. 그당시 타작마당은 마을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또 경제적으로 부유한 밭주인은 개인적인 타작마당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타작마당에서 곡식들은 쭉정이와 알곡으로 분리되어집니다. 먼저 곡식단을 털어서 곡식알이 떨어지게 합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절구통이나 돌덩이 혹은 통나무를 타작마당에 놓고 거기에 볏단을 탁탁 때려서 곡식알을 털어내었다고 합니다 (그림참조). 그런후에 떨어진 곡식알들을 강하고 센 바람을 사용해서 알곡과 쭉정이로 나누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키를 사용해서 쭉정이와 알곡을 나누는 작업을 합니다. 키를 양손으로 잡고 위 아래로 흔들어 알곡은 안으로 그리고 쭉정이를 바깥으로 내 보내는 작업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당시 쯕장이와 알곡을 분리해서 알곡을 거두어 들이는 과정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질수 있습니다. 밭 주인이 같은날, 같은땅에 같은 씨앗을 밭에 뿌렸습니다. 그래서 곡식은 모두가 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랍니다. 같은 햇볕과 같은 비와 같은 영양분을 받은 씨앗은 시간이 지나자 이삭이나고 그리고 점점 성장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추수때에 보니 알곡과 쭉정이로 나뉘어진 것입니다. 같은 씨앗이고 같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왜 어떤 곡식은 알곡이 되고, 어떤 곡식은 쭉정이가 된 것입니까? 그 이유를 우리는 알수 없습니다. 여기서 어떤 목회자는 쭉정이와 알곡이 된 이유를 4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에서 찾기도 합니다. 길가, 돌밭과 가시떨기밭 그리고 좋은 밭의 차이 때문이라고 그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비유의 말씀은 그 비유의 틀안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비유의 말씀을 해석하는 기본 원칙입니다. 예를 들어 4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와 가라지 비유를 생각해보십시다. 이 4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에서 주인이 뿌린 씨앗은 '말씀' 을 의미 합니다. 그리고 밭은 '말씀을 듣는 각 사람의 마음' 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밭이 각각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결과도 다르다는 것이 4가지 종류의 받의 비유가 주는 핵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4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를 마치고 난후에 이어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주인이 뿌린 씨앗은 '천국의 아들들' 이고 밭은 '세상' 이라고 예수님이 해석해주십니다. 자, 그러니까 4가지 종류의 밭의 비유와 가라지 비유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똑같다 할지라도 그 의미는 다른 것입니다. 이 두 비유에서 '씨앗' '밭' 이라는 단어가 똑같이 사용되어졌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그리고 또 가라지의 비유에서 주인이 가라지를 곡식으로 변하게 하겠다는 말씀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그러니 가라지가 곡식으로 변화될수 있다는 논리는 이비유에서는 전혀 맞지 않는 메시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단들은 비유들을 그 틀안에서 해석하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게 성경 여기저기 골라서 마음대로 해석 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서 자기들이 믿고 있는 종교만이 구원을 받게 되고 나머지는 가라지가 되어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말씀을 하고 있는 그 상황을 보면서 신중히 해석해야하고 그래야 이단들이 말하는 주장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자, 오늘 본문은 침례요한이 유대인들을 향해서,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외친 말 중에서 '쭉정이'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12절입니다.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던 민족입니다. 그들의 조상을 따져서 올라가보면 모두가 다 아브라함에서 끝나게 됩니다. 그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선택하시고 아브라함을 향해 너의 자손들은 나의 백성이 될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 이방사람들을 개, 돼지로 여기며 살 만큼,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백성이라고 하는 자부싱이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침례 요한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 혈통으로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수 없다면 누가 들어갈수가 있습니까?

자. 쭉정이와 알곡은 근본이 같은 곡식이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구분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어떤 곡식은 쭉정이가 되고 또 어떤 곡식은 알곡이 되는 지 그이유는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유대인들, 그증에서도 특별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삶을 보면서 '쭉정이' 가 이런것이구나 라고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사실 이론으로는 쭉정이와 알곡의 차이는 확실히 구분할수 있습니다. 쭉정이는 알맹이가 없고 알곡은 알맹이가 있습니다. 알맹이가 있기 때문에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와는 무게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외형적으로 볼 때 구분이 되지 않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럼으로 쭉정이와 알곡의 구분은 내면적인 차이에서만 나뉘어 진다는 사실을 알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쭉정이 인지 알곡인지 구별이 가능하게 하는 그 내면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영적인 쭉정이와 알곡의 차이

1. ()례의 차이

오늘 본문에서는 침(세)례 라고 하는 단어가 여러번 나옵니다. 6절입니다. 6.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세)례를 받더니

7절입니다. '7.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11절입니다,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세)례를 베풀거니와...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왜 요한에게 와서 왜 침(세)례를 받습니까? 6절 전반부에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그리고 11절 전반부를 보시면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세)례를 베풀거니와' 그러니까 요한이 베푼 침(세)례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침(세)례 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이 맨 처음 외친 소리는 '2.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입니다. 그리고 요한에 이어 등장하시는 예수님께서 맨처음 외친 말씀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장 17절) 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 제일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하기 위해선 나는 죄가 있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죄를 지은 죄인임을 인식해야 다음 단계인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이지, 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그 단계인 회개가 나올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이 무슨 죄를 지었나요? 도덕적인 죄입니까? 그럴수 있습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진 우리인간이 살아가면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에게 와서 침(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하는 말을 깊이 묵상해보면 그들의 단순히 도덕적인 죄를 정죄하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베풀고 있는 침(세)례와 예수님의 침(세)례에 대한 차이를 말합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합니다. 12절입니다.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까? 그당시 유대인들은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고 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들을 향해 '쭉정이' 라고 말하면서 쭉정이가 받게 되는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도덕적이고 청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그들을 정죄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인 죄를 많이 짓고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너희들은 나는 지은 죄가 없는 의인이거나, 비록 죄가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 비하면 비교할수도 없이 작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 행위를 회개하라‘ 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인 예식과 교리를 정해놓고 그 범주안에서 종교생활을 준수해나갔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앞에 자신의 할바를 다 했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비판해왔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요한은 그들에게 지적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좀더 우월하고 좀더 잘지켜 나간다고 해서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앞에 얼마나 큰 죄 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정리하면, 요한이 주는 침(세)례는 종교적인 회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을 요한은 그들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베푸는 침(세)례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기 위한 준비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성령 침(세)례는 실제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겠다고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침(세)례 의식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침(세)례는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며 살겠다는 고백을 여러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보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침(세)례 의식으로 인해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성령이 그사람의 심령안에 임재하십니다. 그럼으로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도덕적인 청결만을 유지하게 되는 요한의 침(세)례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예수님의 성령 침(세)례를 받지 않으면 쭉정이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영적인 쭉정이와 알곡의 차이

2. 회개의 차이

내가 영적인 쭉정이냐 알곡이냐 구별하는 기준은 회개의 차이에 있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포함한 그당시 유대인들은 죄를 범할때마다 속죄하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타락한 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회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예배순서에도 있지만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한주간 범한 죄와 허물을 주님앞에 고백하는 ’회개 기도 시간‘ 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된 회개와 거짓된 회개의 차이는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겉모양으로 보아선 알수 업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를 생각하면서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참다운 회개했다고 우리는 쉽게 단정 할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회개는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본문 8절입니다.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참된 회개는 열매가 있습니다. 참된 회개는 그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내가 범한 죄에 대해 통곡하면서 울고 불고해도, 그후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통곡’ 이요 ‘후회’ 이지 ‘회개‘ 는 아닙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형식적으로 회개하는 모양을 취했습니다.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그들에게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알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도 종교 의식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주님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악된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보여야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섰을때 주님은 다른 어떤 열매보다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더 귀하게 보실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생전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엔 그 일은 아주 작은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맺은 열매 중에 내가 회개를 한후 돌이켜서 맺은 그 열매는 정말 귀하고 아름답게 보실것입니다. 왜냐하면 참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심령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두종류로 나누어 보십니다. '의인과 죄인' 이 아니라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죄인''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죄인'으로 나누어보십니다. 다음주에 말씀을 나눌 계획이지만 요한복음 8장에 이 두 종류의 인간이 함께 나옵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끌고 예수님앞에 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 죽게 되어있지만 그당시 로마법은 유대인의 사형집행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을 놓아주라’ 고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범하는 이단자가 됩니다. 반대로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 고 말하면 로마법을 어기는 정치범이 됩니다, 그러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한 시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알고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7.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장 7절)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을 자기 죄를 인정하는 죄인과 자기 죄를 숨기고 있는 남을 비난하고 있는 죄인으로 나눈 것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는 어쩔수 없이 자기 죄를 인정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조건없이 주시는 주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들이 지은 죄를 숨기면서, 겉으로 죄가 드러난 죄인들을 비판하고 억압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자들을 향해 주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분노하시며 심판하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내가 지은 죄에 대해서 머리털 하나라도 다 헤아리시는 주님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범죄하며 드러난 죄에 대해선 나도 저사람과 같이 될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더욱 진지하게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바라옵기는 종교적인 지식의 차원이나 교리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회개가 아니라 참다운 회개를 하심으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 를 맺는 알곡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인 쭉정이와 알곡의 차이

3.성령의 유무

11절 후반부와 12절입니다.

11....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여기서 11절에 나오는 ‘그‘ 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죄인입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로마서 8장 9절입니다.  9.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안에 역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점차적으로 알곡이 되어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그 사람안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교회서 종교생활을 해나가지만 알맹이(성령)가 없기 때문에 결국 ’쭉정이‘ 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이 없이 자신의 능력과 의지만으로도 얼마든지 구제와 선행을 할수 있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서 침(세)례도 받고 교회 예배 순서에 따라 회개시간을 가지면서 종교생활을 해나갈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서 집사 장로 권사의 직분을 받고 섬김과 봉사의 생활을 해나갈수도 있습니다. 다른 곡식과 마찬가지로 겉으로 이삭을 내고 또 성장을 합니다. 그래서 겉모양을 보아서는 쭉정이인지 알곡인지 구별을 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신랑을 기다리고 있던 미련한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겉모양으로 보아서 누가 미련한 처녀인지 누가 지혜로운 처녀인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보내시고 그 성령은 믿는자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나 자신은 쭉정이가 아니라 알곡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나 자신은 아무리 봐도 쭉정이 같다고 낙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다 쭉정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이 있고, 교회 안에서도 섬김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을 쭉정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쭉정이와 알곡의 판단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제 짐작에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지리라' 라는 이 말씀에 완전히 자유로운 성도는 아마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만 이 말씀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요?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한 인격체안에도 알곡과 쭉정이가 섞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말해 어떤 사람의 인격체 안에는 알곡이 많고, 또어떤 사람에게는 쭉정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의 이 쭉정이 같은 모습 때문에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염려가 있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과 동행하며 신앙생활해나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불로 내 인격체 안에 있는 쭉정이는 태워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대법원 판사들이 우리를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도 아니고 국회의원들이 우리를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모든 인류를 위해 중보기도 하신분이 나를 판단하십니다. 아담이 범죄한이후로 굳게 닫혔던 하늘의 문을 자신의 생명의 피로 활짝 여셨던 그 주님이 나를 판단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십니다. 그리고 알곡은 하나님의 곳간에 들이시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쭉정이는 불에 태우실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있지만 충분히 자리지 못한 알맹이가 있는 곡식의 그 껍데기는 은혜의 불로 태우시고 그 남은 작은 알맹이는 곳간에 넣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구세주로 영접했는가 진지하게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안에 계신 성령이 하나님앞에서 나를 증거해주실 것입니다. 그럼으로 가라지 같은 이단이 저와 여러분의 주변에서 성경 말씀을 제멋대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도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구세주로 진심으로 믿고 살아가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안에 계심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하면서 날마다 내가 짓고 있는 죄와 허물을 회개하며 살아가십시다. 그래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 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