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1)

Author
kgmcc
Date
2020-03-29 11:53
Views
67
본문 : 딤후 1장 7절

날짜 : 2020년 3월 29일

 

<딤후 17>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오늘날의 시대를 "불안의 시대" 혹은 “두려움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두려움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오직 두 종류밖에는 없다. 그것은 죽은 사람들과 정신 이상자들이다“ 그러니까 살아있고 제 정신인 사람들은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모여있는 곳에는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특정한 색깔을 두려워합니다. 검은 색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있고 붉은색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바로 실직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실직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별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미신에게 사로잡힌 두려움이 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 4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4자가 죽을 4자와 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아라비아 숫자 4 자가 죽을 4자와 같은 발음 때문에 죽음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4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어떤 아파트 엘리베이트를 타보면 4층대신에 Fourth의 첫 자인 F자가 있는곳이 많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재물이라고 하는 소리와 같다고 하는 이유 때문에 8이라고 하는 숫자를 최고 행운의 숫자로 여깁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아파트 8층이 가장 비싼 값에 팔린다고 합니다. 전화번호나 자동차 번호에도 8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많이 있느냐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올림픽을 할때도 2008년 8월 8일 8시 8분에 개막식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에 서울 올림픽이 있었는데 9월 17일에 개막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아니 1988년 8월 8일 8시 8분에 했으면 팔자가 무려 6개가 되는데 그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버릴수가 있는가에 하면서 아직도 이해를 하지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미신에 사로 잡혀 나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취업이나 대학 시험을 치는날 미역국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요?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고 해서 미역국을 안먹습니다. 그 대신 시험을 치는날에 찹쌀모찌나 엿을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는 미신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루 헤아릴수 없는 수많은 두려움 가운데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디모데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7절 전반부입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닌 것 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은 디모데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디모데는 정말 어린 나이에 바울의 뒤를 이어서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디모데 전서 4장 12절입니다.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연소는 나이가 적다는 의미이잖아요? 나이가 적었던 탓에 교회에서 업신여기고 딴지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디모데는 강직한 바울과는 달리 성격이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구한테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나면 털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성격의 소유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이런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고전 16장 10절 전반부입니다. ”10.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디모데가 오거든 그를 조심 조심 대하라.‘ 오죽했으면 이렇게 편지에 까지 디모데가 두려움이 없이 너희들과 같이 지내도록 하게 하라는 말을 했겠습니까? 이런 디모데가 자신의 멘토요 영적인 아버지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던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실은 디모데에게 너무나 큰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과연 이 목회를 잘 감당할수 있을까? 앞으로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사역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디모데를 사로잡고 있엇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가 가진 이 마음을 알았습니다. ’아, 디모데가 지금 두려움 속에 사로잡혀있구나‘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써서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야 디모데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절대로 두려워 해서는 안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세상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갈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이유를 생각하면 두려움을 극복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시간에는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1.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

7절 전반부입니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바울은 지금 디모데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것이 있는데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두려움은 언제 어떻게 시작 되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갑자기 눈이 밝아지면서 자기들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해온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최초로 경험해보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동산 나무사이로 숨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그때 아담이 이렇게 대답을 하죠. 창세기 3장 10절입니다. ”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두려워 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처음으로 느끼게 된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렇게 두려움은 죄의 결과인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게 만든 원인 제공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으로 말미암아 두려움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죠. 죄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을 분리시킵니다. 죄를 짓으면 짓는 만큼 하나님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게 되어있습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고 멀어질때 당연히 거기에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인가하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어린아이 이지 않습니까? 어린 아이에게서 엄마를 떼어놓으면 자기가 죽는줄 알고 막 울어댑니다. 먹을 것을 주고 장난감을 주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중에는 부들부들 떨면서 막 숨이 넘어갑니다. 그런데 엄마가 곁에 있으면 괜찮아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부모와 떨어지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지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두려움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2. 두려움이 현실이 될수 있기 때문

구약성경을 보면 욥이 나오는데 욥은 당대의 부자이었고 의인이었습니다. 사실 부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은데 욥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따랐는지 하나님은 욥을 이렇게 까지 칭찬했습니다. 욥 1장 8절입니다. “8.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다‘ 이렇게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큼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욥에게 이해할수 없는 고난이 오게 됩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물이 다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장남의 집에서 밥을 먹는데 큰바람이 불더니만 그 바람으로 인해 모든 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욥 자신은 병에 걸렸고, 그 와중에 아내는 욥을 보고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고 저주를 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은 세상에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욥을 너무 칭찬하니까 사탄이 시기 질투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이 하나님께 이렇게 반문을 하죠. ”하나님 욥이 왜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세요?’ 하나님이 욥을 축복하시니까 그렇죠.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어보세요 욥이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가? 아마 하나님을 욕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런식으로 욥을 평가했습니다. 이렇게 상대방을 부추키게 하고 감정을 돋우는 행동을 잘하는 것은 사탄의 특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을 받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욥은 그럴 인간이 아니다라고 변호를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의 생명만은 손대지 말아라’ 는 허용하에 사탄이 욥을 어려움에 빠트린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욥이 이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은 그가 두려운 생각을 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평상시 욥이 가진 생각을 엿볼수 있는 욥기 3장 25절입니다.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이 고난을 당하고 난 직후에 욥이 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평상시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풍족한 재물을 주셨는데 이 재물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자녀를 주셨는데 자녀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나? 지금 내가 건강하지만 갑자기 병이 들면 어떻게 하지?“ 이렇게 두려운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두려운 생각을 가졌고 무서운 생각을 가졌는데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바로 욥의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욥은 평탄하고 행복한 순간에도 불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예를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다가 가데스 바네아 땅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두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땅에 보냅니다. 그 정탐꾼들이 40일 동안 정탐한 후에 돌아와서 보고를 하는데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명의 정탐꾼들은 어떻게 보고를 했나요?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다라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두가지 상반되는 정탐꾼들의 보고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명의 정탐꾼들이 보고한 내용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소식과 부정적인 소식이 있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소식에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식빵에 곰팡이가 있으면 그 식빵이 어떻게 되어가나요? 그 식빵이 좋은 식빵으로 변해가는것이 아니라 곰팡이로 인해서 그 식빵이 점점 나쁜 식빵으로 변해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악한것과 선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악한 것이 더욱 빨리 먹혀들어갑니다. 저수지에 오염이 된 물이 들어가게 되면 오염된 물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저수지 물이 점점 더러워지고 오염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심리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지만 성경에서도 여러군데서 볼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보고에 마음이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했나요? 차라리 우리가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뻔 했다 라고 말하면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두려움에서 말한 것이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이겨내고 믿음을 가졌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왜 두려워해서는 안됩니까? 두려움을 품고 있으면 그 두려움이 우리의 삶에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움을 품고 지내면 안됩니다. 두려운 생각이 몰려오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치셔야 합니다. 여러분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오게 되면 받아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물리칠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두려움을 품으면 그것이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까?

3. 두려움은 백해무익하기 때문

해롭기만하고 하나도 유익함이 없는 것이 두려움 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삶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두려움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고양이 앞의 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혹시 고양이 앞에 놓인 쥐를 본적이 있습니까?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본 사람의 말에 의하면 고양이를 본 순간 쥐는 꼼짝을 하지 못한답니다. 쥐가 평상시에는 얼마나 빠릅니까? 평상시 실력대로라고 한다면 고양이를 보았을때 재빨리 쥐구멍같이 좁은 공간속으로 도망가면 살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쥐는 고양이를 본순간 그 자리에서 신경이 마비되고 근육이 굳어지고 그래서 벌벌 떨면서 기어간답니다. 그래서 잡혀죽는다고 해요. 몇년전에 제 둘째 딸 에스더가 자기 친구가 키우고 있던 강아지를 잠시 데리고 저희 집에 온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당시 저희집에는 햄스터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집안에 들어온 그 강아지가 가는 철장으로 둘러싸인 박스안에 있는 햄스터를 쳐다보는데 이 햄스터가 그 강아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전기 쇼크를 받아은 것처럼 깜짝 놀라더니만 비실비실 거리고, 왔다갔다 하는데 그냥 놔두면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둘째달이 그 강아지를 얼른 2층으로 데려가고 이 햄스터 앞에 얼씬 거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햄스터는 집안에 들어가서 이틀 동안 나오질 않았습니다. 이틀동안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플텐데 꼼작달삭하지 않았습니다. 눈만 한번 마주쳤는 것 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고양이 앞에 쥐 라는 표현이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신경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을 마비시켜버립니다.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생활에도 아주 장애가 되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 가운데 있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깨닫아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두려움은 나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나의 믿음을 약화시키고 부정적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서커스에서 외줄을 타는 사람이 외줄을 타고 건널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제 일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밑을 내려다 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밑을 내려다 보는 순간 동시에 두려움과 무서움이 임해서 중심을 잡을수도 없고, 앞으로 갈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어지러움을 느껴 가야할 앞길을 보지 못하고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사사기 7장을 보게 되면 기드온이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무 많다 라고 하시면서 두려워 떠는자는 집으로 돌려 보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사기 7장 3절입니다. “3.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두려워 떠는 자는 집으로 돌려보내라 라고 했더니 3만 2천명중에 2만 2천명이 집에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만명도 많다라고 하시면서 마지막에는 3백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를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전쟁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건강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임하게되면 신경이 쇠약해지고 불면증이 걸릴수도 있고 우울증에 시달릴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병들어 죽기도 하지만 두려워서 죽게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에 전쟁으로 죽은 미군의 숫자가 30만명 이었습니다. 적군의 총칼에 죽은 숫자가 30만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과 남편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난후에 내아들 내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으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지내다가 신경쇠약 불면증 우울증에 걸려서 죽은 숫자는 백만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배 이상 되는 숫자가 적군의 총과 칼에 죽은 사람보다도 내남편 내 자식이 죽을까봐 두려워하다가 여러가지 질병에 걸려 죽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온세상 사람들이 두려움에 싸여있습니다. 얼마전에 주식과 채권의 동향을 보았는데 완전히 폭락장이었습니다. 연방 은행이 돈을 아무리 풀어도 계속 폭락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싸여있기 때문에 아무리 돈을 풀어도 소용없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은 블랙혹과 같이 모든 것을 빨아들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미국 연준이 초금리 정책을 행하였지만 주식 시장은 계속 폭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연준이 다시한번 2조 2천억불이나 되는 돈을 풀고 그리고 무제한 돈을 풀 수 있다 라고 말하자 겨우 주식시장이 진정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것이 언제 또 폭락하게 될지 그누구도 장담할수 었습니다.

두려움은 흔들의자와도 같습니다. 흔들의자에 앉아서 아무리 많이 흔들어보아도 그 흔들의자는 한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이 두려움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우리의 인생을 막 흔들어 놓습니다. 아침 7시나 8시에 일어나는 사람을 새벽 2시나 3시에 일어나게 합니다. 그래서 규칙적으로 살아왔던 사람의 인생 주기를 불규칙적으로 막 흔들어 놓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걸음도 나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계속 두려워하고 생각하게 하지만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해무익한 것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가장 많이 기록된 단어는 사랑하라 겸손하라 섬기라가 아닙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말씀이 성경에서 가장 많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두려워하는 것을 하나님은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장 많이 하시는 내용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 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왜 두려워해서는 안됩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하면 그내용이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두려움은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는 잘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처한 현실은 두려움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선택을 해야 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지금 우한 코로나 확진자의 수와 사망자의 수가 늘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움에 싸이지 않겠다는 결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대로 두려움없이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너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두려워 하는 것을 죄악으로 보십니다. 두려움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일 뿐입니다. 그럼으로 바라옵기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갈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