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은총은
<출애굽기 33장 12-16절>
12.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지난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을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퍼하고 자신들이 아끼던 장신구를 떼어내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33장 7절 후반부입니다. 7....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회막으로 나아가며’ 그리고 10절입니다. 10.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 금송아지가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신이다 라고 말하던 그들이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모하며 일어서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려면 반드시 하나님과 동행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치고 예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대화를 하지 않고 식사도 같이 하지 않는 부부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예배를 생명처럼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배를 귀중하게 생각하시고 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과 동행할수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회막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 나오는 회막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성막은 아닙니다. 아직 성막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성막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나기 전에 완성하게 됩니다. 시내산에 약 1년간 머물고 있었는데 그동안에 성막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막은 성막이 아니고 임시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처소라 할수 있습니다. 그런데 9절을 보게 되면 모세가 이러한 회막에 들어섰을때에 시내산에 머물고 있던 구름기둥이 그 회막에 임하기 시작합니다. 9절입니다. ‘9.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구름기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11절 전반부입니다. 11.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9절과 11절을 같이 연결해서 보면 모세는 회막속에서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10절입니다. 10.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회막문에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그 뒤에 나옵니다.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장막 즉 자기 집 문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보면서 예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 장막을 떠나 회막으로 나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입니다. 7절 후반부입니다. 7.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즉 여호와를 간절히 찾는자는 자기 장막을 떠나 회막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세가지 종류의 하나님의 사람을 볼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모세이고 두 번째 부류는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각기 자기 장막문에 서서 예배했습니다. 그들이 언제 예배를 했습니까? 10절을 모시면 10.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서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예배하며 ‘구름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구름 기둥 즉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고 다 일어나 예배했습니다. 이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가지는 않고 자기 장막에 머물면서 회막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까 회막에서 어떤일이 일어나는가를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갔는데 회막안에서 어떤일이 일어나면 그때 예배를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면에서는 기회주의자들이라 할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회에 나아오지 않고 자기가 사는 집에서 교회를 바라봅니다. 교회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 관심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지켜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들은 자기 장막을 떠나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앙모하고 찾는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 처소를 벗어나 교회에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예배를 했습니다. 마치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모세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모세처럼 우리 믿는 성도들이 자기 친구와 대면하여 교제를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15절 후반부입니다. 15.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친구처럼 친밀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모세는 구약 시대 사람입니다. 다시말해서 옛 언약 시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친구처럼 대면하여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새 언약시대 사람입니다. 다시말해서 오늘날은 성령 하나님께서 믿는 성도들인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이미 내안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모세보다 하나님과 더 친밀한 사귐을 가지고 살아갈수 있는 좋은 환경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모세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는 중보 기도를 보면 우리는 기도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 통행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일방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거나 내 마음의 소원만 이야기 하고는 끝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기도는 대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대화는 서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통고이지 대화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나이가 많으신 어른과 대화를 나눌때에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나이가 있으신 어른들이 하는 말씀을 내가 먼저 듣고 그다음에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믿는 성도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되고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5만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았던 조지 뮬러는 기도하기 전에 언제나 성경을 읽었습니다. 한시간 성경을 읽으면 한시간 기도를 했고 30분 성경을 읽으면 30분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조지 뮬러처럼 까지는 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중요한 원리는 배워야 합니다. 먼저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이 원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이후에 기도를 하게 되면 마음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기도를 해도 조금 더 친밀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대화라는 것은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주고 받는 것이지 아무런 감정 없이 일방적으로 말만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닙니다. 영성일기를 써나가시는 분으로 알려진 유기성 목사님께서 이러한 고백을 하신적이 있습니다. 자기 교회에 행사와 또 자신이 외부로 나가는 집회 요청이 많아서 언제나 나에게는 시간이 부족하다, 시간이 부족하다 라고 생각을 해왔답니다. 그런데 하루는 기도를 하는 중에 ‘너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기도이다’ 라고 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직접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듣게 된 것이죠. 성경은 “쉬지말고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이 생각나니까 자기에게 부족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기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심령과 대화를 나누시길 원하십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 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하나님께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13절입니다. 13.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하나님 나로 하여금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요? 앞부분을 보시면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이 고백은 모세 자신이 과거에는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지금 그냥 막연하게 주의 은총을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목전에 은총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절을 보시면 ‘주의 목전에 은총’ 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그리고 16절과 17절에도 ‘주의 목전에 은총’ 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러면 ‘목전에 은총’ 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자로 풀이하면 눈 목자 앞 전자이니까 목전의 은총은 바로 ‘눈앞의 은총’ 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앞에서 보고 경험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인 것입니다. 그래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지금 시내산에 오기까지 ‘주의 목전에 베푸시는 은총‘을 경험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어린양 사건으로 인해 애굽나라의 모든 장자가 죽고 짐승의 첫새끼가 죽임을 당했을 때 애굽나라 바로왕이 쩔쩔매면서 애굽에서 나가게 한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한 귀금속까지 내주면서 급하게 애굽에서 나가게 한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그 갈라진 홍해사이를 건너갔지만 뒤쫓아오던 바로왕의 군사들은 다시 합쳐진 홍해로 인해 몰살당하는 장면을 목전에서 경험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난 사흘후에 마실수 없는 마라의 쓴물을 만났을 때 그 쓴물이 단물로 변하고, 그리고 그후 반석이 갈라져서 생수가 나오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눈송이처럼 내려오는 만나를 보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들의 앞길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것을 목전에서 보았습니다. ’목전에서, 눈앞에서 은총‘ 을 경험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목전에서 은총을 경험한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목전에서의 은총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은 다윗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경험한 목전에서의 은총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어린 다윗이 물맷돌을 가지고 거대한 골리앗 장군을 쓰러트리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때 다윗이 누렸던 목전의 은총은 바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 눈앞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경험했던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바라옵기는 우리도 이와 같은 목전의 은총을 누리며 신앙생활을 해나갈수가 있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음악 연주회를 가보신분은 아시겠지만 실제 현장에서 목전에서 경험한것과 텔레비전에서 음악 연주회를 보는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야구나 축구 경기장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는 것과 텔레비전에서 시청하는 것하고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때 처음으로 야구 경기장에서 프로 야구 선수들이 하는 경기를 처음으로 본적이 있습니다. 그당시에는 이만수선수가 삼성에서 캣처를 하고 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하던 때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야구선수들의 몸집이 거대한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투수가 던지는 야구공을 방망이로 때릴때 그 딱하는 소리가 생생하게 제 귀에 들리고,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는 소리가 제 귀에 너무나 생생하게 들렸던 것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음악 연주회나 운동 선수들의 경기를 실제 현장에서 눈으로 보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이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동안에 이렇게 목전에서 베풀어지는 은총을 경험하는 것은 가장 큰 은혜중의 은혜라 할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모세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희들에게 목전의 은총을 베풀어주심으로써 저희들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와 함께 올라갈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저희들에게 다시한번 목전에서 누릴수 있는 은총을 입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가 이러한 기도를 해야 할 때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예전에 이 교회는 주님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고 누렸던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교회가 그 어느 교회 성도들보다도 사랑이 넘쳤고 애정이 가득했던 교회이었습니다. 주님의 목적에서 베푸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은 목회자를 따랐고 목회자는 성도들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교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한번 저희들에게 주님이 목전에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목전에서 누릴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함께 동행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저희들이 이세상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다시한번 주님의 목전에서 누리게 되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실줄 믿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야 할때라고 생각합니다. 바라옵기는 모세가 드린 기도처럼 우리도 날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를 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목전에 은총을 누리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구별된 존재로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16.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천하 만민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은 사람들은 이방 나라 사람들과 구별되며 살아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주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시면 나와 주의 백성이 주 앞에서 은총 입은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야만 나와 주의 백성이 세상의 다른 민족과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때에만 주님 앞에서 목전의 은총을 입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가 주의 목전에서의 은총을 간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능력이나 거룩함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사람들이 구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보다도 불신자들 중에 더 의롭고 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들과 하나니의 사람들간에 구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안하시고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구별되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구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방나라 사람들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점에서 구별이 되었습니다. 돈이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들을 구별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다 부자가 되어야 하고 세상사람들은 다 가난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이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사람들을 구별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가 다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능력이나 지식이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 사람들을 구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만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여기 우리 가운데 충만할 때 교회와 세상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가 어떻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빛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만 우리는 구별된 존재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통해서 주의 목전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창세기 39장 3절입니다. 3.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인 요셉의 주인 보디발장군이었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울왕의 눈에 비친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상 18장 12절입니다. 12.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여호와께서 ...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과 구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에게 이렇게 간구한 것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15.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천사를 먼저 보내셔서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내 쫓으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해주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못갑니다. 하나님이 함께 떠나시지 않으신다면 우리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런식으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천사를 미리 보내셔서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원수들을 다 물리쳐주시고 그리고 가나안땅에 들어갈수 있도록 약속을 해주셨는데 그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저희들 아무 별탈없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게만 해주세요. 그때부터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하는 사업이 잘되어진다면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아도 인생을 편안하게 살아갈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모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올라가지 않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가나안땅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그 가나안땅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그곳이 광야라 할지라도 축복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 할지라도 저주의 땅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천국이 될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기에 빛의 나라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사랑의 나라인 것이고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거룩하고 의로운 나라인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에 영생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가장 큰 축복이요 본질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출세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업의 성공이나 건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땅에서나 저 하늘에서나 그어디나 천국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이 가장 큰 축복이요 가장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슬퍼하며 자신의 장신구를 떼어내며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4절입니다. 1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내가 친히 가리라’ 사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부모가 자식과 함께 살아가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자식이 한눈을 팔고 속을 썩여도 언제나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모세는 하나님의 목전 은총에 호소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주의 목전에서 은총을 입게 하여주시옵소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이시간 모세의 기도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눈앞에서 볼 수 있고 경험할수 있는 목전에서 누릴수 있는 은총을 간구할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목전에서 누릴수 있는 은총이 아니면 우리 가정은 회복될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주님 목전에서의 은총이 아니면 내 남편이 내 자식은 돌아올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목전에서의 은총이 아니면 우리 교회가 회복 될수 없습니다. 하나님 목전에서의 은총을 입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내 건강이 회복되고 내 가정이 회복되고 내 교회가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까지 저희 눈앞에서 보게 하시고 경험하게 하신 목전의 은총을 입게 해주신 하나님 앞으로 미래에도 이 주의 목전에서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를 할 수가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금 광야의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과 동행함이 없이는 이 인생길을 살아갈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와 함께 가시기를 원하십니까? 잔소리를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 쉼과 안식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같이 가시길 원하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은 우리가 인생길을 가는 동안 쉼과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나와 같이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물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에도 고낭이 있고 풍랑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랑과 고난속에 있다 할지라도 참 쉼과 참 안식을 누릴수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풍랑을 이기고 고난을 이겨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바라옵기는 신앙생활 해나가는 동안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목전의 은총을 간구하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주님과 언제까지나 동행하심으로 참된 안식과 참된 쉼을 누리실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