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길가에 앉아있는 인생

Author
kgmcc
Date
2020-04-25 20:51
Views
40
본문 : 마태복음 20장 28-34절

날짜 : 2020년 4월 26일

 

<마태복음 20장 28-34절>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31.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본문을 보시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사람은 여리고 성 문바깥에 위치한 길가에 앉아있습니다. 30절 전반부입니다. ‘30.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그리고 이 길가에 앉아있는 두 맹인의 모습은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 비춰지고 있는 우리의 인생은 어떠한 인생입니까?

1. 길가에 앉아있는 인생

30절입니다. “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맹인 두사람이 길가에 앉았다가’ 맹인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은 여리고 성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안에서 성바깥으로 나오시는데 그때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29절입니다. “29.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간 것은 제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많은 이적을 행하시니까 호기심의 차원에서 따라간 것입니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던 그길에 맹인 두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시작되고 있는 상황이죠.

◎ 두 맹인이 처한 입장

여기서 두 맹인이 처한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길가에 앉아 있는 이 두 맹인에게 오늘 하루 먹을 것이 생기느냐 생기지 않느냐, 내일까지 먹을수 있는 것이 생기느냐 생기지 않느냐 하는 것은 자기 앞에 어떤 사람이 지나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기들 앞에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귀한 가치가 있는 은전 한닢을 던지고 가면 그날은 아주 대박이 나는 날입니다. 그날은 아주 행복하고 기쁜 날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자기의 동냥 그릇을 발길로 찰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날은 아주 운수 나쁜 날입니다. 기분이 잡치는 날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두 맹인은 자기앞에 어떤 사람들이 지나가느냐에 따라 행복한날이 되기도 하고 기분이 나쁜 날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전 한닢을 준 자기들에게 준 사람이나 반대로 그 동냥그릇을 발길로 차버린 사람들이 그날 무슨일이 일어났었는지에 대해서 이 두 맹인은 알수없습니다. 여리고 성안에서 크게 장사를 하고 많은 이익이 남아서 기분 좋게 성문 바깥으로 나오다가 거지를 보고 은전 한닢을 던져줄수 있습니다. 아니면 반대로 여리고 성안에서 크게 손해를 보거나 기분이 안좋은 일을 당해서 별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 있는데 한푼 달라는 말에 신경질이 나서 그 동냥그릇을 발길질 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 자기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리고 성안에서 어떠한 일을 만났느냐에 따라 이 두맹인에게는 행복한 날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날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사업을 하시는 성도님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거의 대부분이 힘들어 하십니다. 뭐 사업하시는 분만 아니라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도 모두가 힘들어합니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운영하는 가게나 사업체도 강제로 문을 닫고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하니 참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여러 교회 목사님들도 이 우한 코로나 사태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0명 미만의 모임만을 허락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교회들이 교회서 예배를 드릴수 없습니다. 교회 예배나 재정 상태도 어렵지만 또 교회 성도들의 힘든 경제사정까지 생각하니까 목사님들의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지금은 2007년도부터 시작된 서브프레임 론 모게지 사태로 발생한 금융 위기보다 더 힘든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때는 미국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전 세계 경제가 동시에 셧다운 되었으니 경제가 훨씬 더 힘들어 지게 될 것은 확실합니다. 이런 코로나가 어느날 갑자기 저와 여러분 앞을 지나가게 될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저런 어려움을 겪게 될것이라고 우리는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리고 성 바깥 길가에 앉아있는 이 맹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맹인들은 여리고 성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서브프레임 모게지 론 사태나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두 맹인에게 여리고 성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비슷합니다. 여리고 성안의 경기가 좋아지고 분위기가 좋으면 자기들앞에 있는 동냥 그릇에 동전뿐만 아니라 귀한 은전도 떨어집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안에서 이 서브 프라임 모게지 론 사태나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사태가 발생하면 이 맹인들은 자기 밥그릇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했다가는 자기 밥그릇이 날라가버릴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런 것입니다. 여리고 성안에 어떠한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그리고 내 앞에 어떠한 사람이 지나가느냐에 따라 그순간 만큼은 행복한 날이 되기도 하고 괴로운 날이 되기도 하는 인생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길가에 앉아있는 두 맹인들의 삶과 같은 모습 인것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우리의 인생은

2. 예수님을 만날 필요가 있는 인생.

32, 33절입니다. “32.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3.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주여 우리의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보지 못하는 맹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눈을 뜨게 하시는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름대로 자랑꺼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자랑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학식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재산을 자랑하기도 하고, 기술을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고 성경 지식을 자랑하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저마다 자랑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지도 자기 자식들에게는 자랑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하잖아요. 하루는 불이 활활 타고 있는 집을 보면서 거지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이렇게 자랑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너는 아버지를 잘 둔탓에 집에 불이 날 걱정은 없겠구나” 그래서 아들이 이렇게 한술 더 떴다고 해요. “예, 아버지 덕분에 도둑맞을 걱정도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도 자랑 하는 것 같습니다. 몇년전에 경험한 일입니다마는 하루는 두 성도님이 열심히 싸우시는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곁에 있는 교인들이 말렸지만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두 사람 다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느 한 성도님이 이 한마디 말을 하니까 싸움이 딱 그치더라고요. “야, 내가 너보다 나이가 한 살이 더 많아. 그런줄 알어‘ 그러니까 다른 성도님이 그냥 입을 다물더군요. 그때 저는 나이도 굉장한 자랑꺼리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하긴 나이는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앞서 갈수는 없죠.
여기 본문에 나오는 이 두 맹인거지도 마찬가지로 자랑꺼리가 있었습니다. 이 여리고 성문 바깥에 있는 이 자리는 그 동네에서는 가장 목이 좋은 자리입니다. 골목길이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성문바깥 큰 대로입니다. 남이 부러워 할만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 두명중에 한사람은 마가복음 10장에 보시면 그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은 바디매오 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에는 바디매오 한사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대표적인 인물만 기록할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오는 두 거지 중에서 바디매오가 나이가 더 많은 고참이고, 또 다른 거지는 나이가 어린 후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디매오 고참 거지는 후배거지에게 거지의 신분을 가지고 보다 쉽게 생존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교수법도 생각해볼수 있습니다. “야, 동생 이 발자국 소리를 잘 들어봐. 이 발자국 소리는 말이야. 짐을 메고 이리로 오고 있는 소리야. 발자국 소리가 보통 사람들보다 무겁게 느껴지잖아. 이런 사람들은 하인들이야. 그래서 우리를 도와 줄수 있는 형편에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소리질러 보았자 소용이 없어. 입만아파.“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냥 지나갑니다. ”봐라 내말이 맞지. 앞으론 말이야. 이런 친구들이 지나갈 때 한푼 달라고 소리 지를 필요가 없어. 괜히 소리를 질렀다가는 시끄럽다고 밥그릇을 차버리는 일을 당할 수 있어“ 그런데 저 멀리서 천천히 걸어오는 발자욱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그사람들이 가까이 올수록 좋은 향수 냄새가 납니다. 그러자 이 선배거지가 말합니다. ”야 동생, 이 향수냄새는 말이야. 동방에서 온 장사꾼들에게서 나는 냄새야. 이런 사람들이 지나갈 때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푼 달라고 크게 외쳐야 돼“ 그리고 이사람들이 지나갈 때 한푼 달라고 거지들이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런데 이 동방에서 온 장사꾼들이 지나가면서 이 맹인들에게 동전 한푼 던져 주고 지나갑니다. 그러자 이 선배거지가 말을 합니다. ”야 봐라 내 말이 맞지“ 이렇게 이 고참 거지는 후배거지에게 인생을 보다 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후배거지는 선배 거지를 존경하면서 ’자기에게도 언젠가 이 선배처럼 많은 것을 알게 될 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르치고 또 배우게 되는 수준은 실제로 이정도의 차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겨우 나와 가까이에 있는 사람밖에 알아주지 않는 것입니다. 목회자라면 같은 교파에서만 알아줍니다. 좀더 적용범위를 넓힌다 할지라도 같은 종파인 기독교내에서만 알아줍니다. 이슬람교나 불교에서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수라고 한다면 같은 전공분야에서만 알아줍니다. 그러니까 길거리이냐,학교냐, 회사이냐, 병원이냐 라고 하는 현장의 차이만 있을 뿐 그 외 가르치고 배우는 모습과 원리는 다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맹인 거지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은 길거리이었고.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은 학교라고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배우는 원리는 비슷합니다. 길거리이냐 학교이냐, 회사이냐, 병원이냐 이런 현장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과 원리는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당시 여리고 지역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왕래가 많은 상업과 무역의 도시 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루종일 앉아있으면 지나가는 사람들로 부터 전 세계가 돌아가는 소식을 들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날때마다 이 두 맹인들을 귀로 들은 내용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형님, 요즘 로마 황제가 병이 들어있다는데 참 걱정입니다. 로마황제가 건강해야 이 세상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아갈수가 있을텐데 말입니다. 참 걱정이 됩니다” “그러게 말이야. 얼마전에 아테네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다는데 로마황제가 병이 든 상황에서 로마군인들이 제대로 그 반란군을 진압할 수가 있을지 참 걱정이 되네.”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그런데 요즘 여리고 지역 성주님이 살이 졌다지요? 뇌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다음에는 청렴결백한 성주가 나와서 깨끗한 정치를 해야 할텐데 여리고 성안 경기가 걱정이 됩니다”  이런식으로 이 두 맹인 거지들은 시간이 한가하면 자기들이 귀로 들었던 세상소식을 가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런면에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도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에 나오는 세상소식을 보고 들은 내용을 가지고 시간이 나면 서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세상을 바꿀 능력과 힘도 없으면서 우리도 이세상에 일어났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염려스런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미국에 코로나 확진 환자수가 많아지고 있는 것에 대해 염려합니다. 특히 뉴욕과 워싱턴 지역같은 대도시에 코로나 환자 숫자가 많아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걱정하며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 모여 생활하는 요양원같은 곳에서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일에도 염려합니다. 뉴욕 주지사인 앤드루 쿠오모와 트럼프 대통령이 갈등관계를 겪고 있는 모습에 대해서도 걱정하며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길가에 있는 두 맹인처럼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전해 듣고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대화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맹인들이 길가에 앉아있는 동안에 수많은 소식들을 듣었지만 자기들에게 가장 필요한 소식은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이 맹인들은 소리질러 외친 것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이 소경들은 자기들의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야 할 필요성이 있는 인생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나갈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큰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이 맹인들이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것 처럼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인생입니다. 그래요. 이렇게 성전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 어디에서나 이 맹인거지와 같은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길 사모하십시다. “예수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 저희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옵소서. 예수님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외치심으로 말미암아 가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예수님을 만날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우리의 인생은

3. 예수님을 따라가야할 인생.

34절입니다. “34.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이 맹인들이 큰소리를 지르자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는 이 두 맹인들을 데려 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러자 이 두맹인이 이렇게 말을 하죠. “주여 우리의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이 두 맹인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 인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요 구원자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귀로 듣고 알았겠죠. 성경은 로마서 10장 17절에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이 맹인들은 자기들이 길가에 앉아 있을때 지나가는 유대인들이나 랍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었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포로 된 자가 자유하게 되고 눈먼자가 다시 보게 된다고 하는 구약 성경 이사야서에 기록된 내용을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두 소경은 예수님이 메시야 인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것이죠. "주여 우리가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돈을 원하나이다, 건강을 원하나이다. 집을 원하나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돈과 건강과 집도 인생에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맹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눈을 뜨는 일입니다. 이 두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며 살아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남에게 구걸을 하며 살아야 했던 이유는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염려와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맹인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인생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눈을 뜨는 일입니다. 눈을 뜨게 되면 구걸하지 않아도 됩니다. 길가에 앉아있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들은 눈을 뜨게 되자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자유함을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주변을 보면 눈뜬 거지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눈이 떴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고 이제는 구걸하는 생활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갈 신분임을 본문은 교훈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일어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이전과 같이 다시 구걸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맹인들은 자기 눈이 열리고 난이후 옛날처럼 다시 길가에 앉아서 거지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거지 생활을 할것 같으면 왜 눈을 뜨게 해달라고 해요?. 차라리 동전 한닢 달라고 하는 것이 더 유익하지요.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 따라가는 생활을 하게 되면 예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전처럼 다시 돌아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간단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입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시작됩니다.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길려고 왔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내 생명을 주려 왔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는 여리고 성문바깥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두 맹인 거지를 만나십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천국을 보게 되었고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손이 또다른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다른 예수님의 발이 되고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처럼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섬기는 생활을 하시며 이세상을 살아가시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